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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 3
level.3 태사냥
  • 2016-03-27 16: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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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정말 가야돼요? 안 가면 안 돼요? "

" 악마가 나타났다잖아. 천사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꼭 가야해. "


김수현은 클랜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원정을 갈 인원을 정비했다. 살아 돌아온 멤버들은 한 명도 넣지 않았다. 쉬게 해주기 위해서다. 김수현은 그래도 전 회차에 겪은 게 있어 상대적으로 덜 힘들다. 물론 그도 지금 지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해선 버틸만했다.


김수현은 살아남은 이들을 모두 찾아가 천천히, 또박또박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있어봤자 더 힘들어질 뿐이라고 원정을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안솔은 따라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아니, 그녀라면 못했다고 봐야겠다. 안솔은 첫 원정을 떠날 때처럼 몸을 떨어댔고, 김수현을 계속해서 붙잡았다. 이번에도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자신을 붙잡는 걸까? 김수현은 어쩔 수 없이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준비를 위해 안솔에게 질문을 하나 했었다.


" 내가 죽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위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번에는 다른 애들이 위험한 것도 아니잖아. "

" 그래도… 그래도……. "


안솔은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김수현은 신중하게 여러 번 질문을 했었다. 자신이 위험하냐? 아니라면 동료들이 위험하냐?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클랜원이 죽기라도 하냐? 안솔은 그 어떤 질문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이번에는 위험한 것도 아니다. 아마 저번 원정 같이 대참사가 아닌, 어느 때와 같은 원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안솔은 자신을 막는가?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자면 김수현은 지금.


" 가야 될 시간이네. "

" 오라버니! "


안솔이 애처롭게 자신을 불렀지만 김수현은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하듯 내버려두고 몸을 움직였다. 안솔이 말하는 건 항상 감이었다. 그 감은 지독히도 잘 맞아 떨어졌기에 저번 원정에서의 일은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도 위험하지 않다. 그런데 왜 안솔은 자신을 말리는가? 김수현은 이에 대한 답을 달리 정의했다.


" 정 불안하면 쟤하고 같이 있어. 나처럼 똑똑한 녀석이니깐. "

" 어머. 그거 혹시 자기 자랑이에요? "


제갈 해솔이 교묘하게 웃어보였다. 안솔에게 그녀를 보라고 고개를 돌린 뒤, 김수현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잠시 조용해지는 듯 했으나, 안솔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병든 병아리마냥 몸을 떨면서 힘들어하던 그녀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묘하게 광기어린 박력에 김수현은 잠시 움찔거렸으나,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형의 눈빛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안솔에게서 멀어지고 모두와 가까워지자, 형, 김유현이 애틋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클랜원들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한소영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김수현은 둘 모두를 좋아했지만, 이 번 만큼은 그들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전날의 악몽처럼 죄책감을 증가시키는 것 같았다.


" 그럼, 동대륙을 구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하겠습니다. "


김유현이 크게 손을 들고, 증폭 마법을 사용해 외치자 주위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그렇다. 이곳은 광장이었다. 안솔과의 신파극(?)때문에 머셔너리 클랜 대부분이 잊은 사실이었지만,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북대륙 내에 모든 싸움을 뒤로한 채 동대륙 구제라는 명목 하에, 많은 클랜이 힘을 합쳤다. 진정한 적, 천사의 적인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김수현은 그 출발을 위해 가장 앞장서서, 발을 내딛었다.


" 출발하겠습니다. "

" 와아아아────!! "


북대륙의 함성이 동대륙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 함성이, 서대륙에게까지 들릴지는 알 수 없었다.


제 2차 원정.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시작한 2차 원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서대륙은 한 인간에 의해 멸망했다.


정확한 시간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이유정 스스로도 살인을 하느라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을 때, 서대륙은 완전히 붕괴됐다. 문명이 사라진 곳은 더 인간이 사는 곳이라 보기 어렵다. 때때로 보이는 문명의 흔적들은 인간이 살았음을 증명할 뿐이지, 궁극적인 지표는 되지 못했다. 훗날 이곳에 새로운 사람들이 정착하고, 잊힌 문명을 발견해낸다면 과거의 있었던 일들을 알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현재로서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봐야했다.


그럼에도 간혹 악마가 말을 걸어오면 이유정은 그것을 집중하며 들었다. 악마의 말은 달콤하다 들었지만 이유정이 듣는 것들은 쓰디 쓴 고통뿐이었다. 그럴수록 이유정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져갔다.


머셔너리 클랜이 원정을 떠났다. 원정에서 머셔너리 클랜이 돌아왔다. 머셔너리 클랜원 대다수가 죽었다고 한다.


이유정은 여기서 실소를 머금었다. 그렇게나 자신만만해하던 인원들을 데리고 원정에서 죽다니. 우습게 보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있었다면, 원정은 분명 성공했을 것이다. 그런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짓고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이유정은 문득 이곳이 북대륙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남은 서대륙의 부랑자들을 도륙할 때, 또 다른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동대륙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유정은 크게 분노하여 당장에라도 마검을 버리려고 했으나, 악마의 말을 듣고 행동을 무를 수밖에 없었다.


' 악마란 본디 화합되지 않는 존재다. 우리의 의견을 따르는 이도 있었지만, 안 따르는 이도 있었지. 그들은 남은 세력을 이끌고 동대륙에 모든 것을 건 거다. '


이유정은 김수현이 걱정되어 당장에라도 북대륙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악마가 말렸다. 그는 교묘한 언변으로 이유정을 옭아맸다. 이유정은 그럴 때마다 서대륙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어차피 그들은 약하다. 네가 좋아하는 김수현이 그들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고 보나? 또, 네가 간다고 김수현이 다시 받아줄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있나? '


답은 ' 아니다 ' 였다. 이유정은 클랜을 나왔다. 일전에 안현의 모습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유정이 클랜에 돌아간다 하여도 이 상태로는 김수현에게 다시 내쳐질 게 분명했다. 완전히 강해지고 돌아온다. 그게 이유정이 바라는 것이었다. 그 김한별도 클래스가 좋단 이유만으로 다시 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유정이, 못할 것도 없지 않는가? 그 알량한 증오심이 이유정을 강하게 만들었다.


' 어차피 네가 생각하는 부랑자들은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죽이는 데 손속을 두지 마라. '


이유정은 악마의 말을 따라 더욱 잔인하게 부랑자들을 죽여 나갔다. 그럴수록 희비가 교차했다. 김수현이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한 망설임과 악마가 한 말을 따르는 데 있는 희열. 두 개가 늘 김한별과 그녀의 관계처럼 부딪쳤으나 종지에는 희열이 이겨버리고 말았다. 이유정은 부랑자들의 목을 벴다. 그리고 웃었다. 횡으로 벤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보라를 온 몸으로 받으며 웃어보았다.


' 많이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죽이면 네가 원하는 힘을 주도록 하겠다. '


그러니깐, 이유정은 강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악마의 말을 따르자 강해지는 게 실제로 느껴졌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잠재력이 있던 걸까. 미미하지만 능력치도 올랐다.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는 이유정의 능력치에서 이 일로 능력치가 올랐다는 것은 큰 의미를 차지했다. 이유정은 악마를 조금 더 굳게 믿고, 말을 따랐다.


물론 대가도 있었다. 이유정은 죽을 정도의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악착 같이 적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이유정이 잃은 게 있다면 그건 인간성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잔인했다. 살아남기 위해, 더러운 부랑자들을 죽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그것은 김수현을 위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유정이 남은 서대륙의 잔존 세력들을 죽이고, 더 무리를 짓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살인을 저질렀을 때, 이유정은 악마의 음성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악마가 스스로 답해줬다.


' 우리의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 그럼 네게 마지막 부탁을 하겠다. '

' 씨발! 또 뭘 하란 거야?! '


악마가 또 다시 ' 마지막 ' 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 이유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혔다.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김수현이 싫어하는 게 묻어버리고 말았다. 이 흔적을 아무리 지우고 지운다고 해도, 자신의 가슴속에는 계속해서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김수현이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 우리를 죽여라. '


악마는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이유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악마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이렇게 달아나봤자 천사들은 악마가 물러났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싸워 온 적이니 그럴 게 분명하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악마들의 분신을 죽여 달라 부탁했다. 이유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서대륙의 부랑자들을 죽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악마. 지옥에서 가장 강하다 불리는 악마들이 서대륙에 소환됐다. 급조하게 받쳐진 제물은 악마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이유정하고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유정은 악마의 말대로 분신이라고 이야기 한 악마를 죽였다. 악마는 허무하게 죽어나갔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웃고 있었다. 참 악마답다. 이유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그런 행위가 몇 번이고 이어지고, 지금까지 말을 하던 악마가 소환됐을 때, 그 악마가 이야기했다.


' 악마들을 죽였다는 증거로 이것들을 가져가라. 그렇다면 너는 천사들에게 원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결국 김수현이 무서워서 보상마저 천사들에게 떠넘기려는 것인가! 이유정은 악마들을 비웃으려 했다. 그러자 악마가 마검을 가리키며 그것을 선물로 주겠다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마검을 성검으로 다시 바꾸는 데는 오래 걸리고, 바꾼 뒤에 이유정에게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으니 천사들에게 그 검을 보여주는 건 하지 말라 권했다. 이유정은 흔쾌히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악마들을 죽이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던 악마도 죽인 뒤, 이유정은 서대륙에서 벗어났다. 참으로 상쾌했다. 그녀는 북대륙으로 넘어오자마자 여관을 잡고 샤워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샤워는 좋았고, 경계를 하지 않아도 돼 기분이 괜찮았다. 그녀는 악마의 말대로 악마가 죽고 남긴 것들을 신전에 가지고 갔다.


신전과 관련된 사람들은 이유정은 깍듯이 대했고, 이유정은 손쉽게 담당 천사하고 만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이유정이 생각해도 꿈만 같았다.


' 사용자 이유정.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신은 분명 악마들을 죽인 증거를 우리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저희 천사들은……. '


담당 천사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유정은 천사들에게 보상을 받았다. 천사들이 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것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을 따라 일찍이 악마들을 죽인 전례가 있다. 그리고 지금 보여준 증거들로 보아, 천사들을 위해 매우 큰 노력을 해주었다. 그렇기에 이유정이 바라는 것을 최대한 수용하도록 하겠다.


이유정은 그곳에서 비밀 상점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더 많은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 제로 코드 ' 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집에 갈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수현은 분명 집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자신이 알게 되었다. 비록 악마들 덕분에 얻은 정보였지만 그래도 김수현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이룰 수 있었다.


천사들은 이 일로, 이유정 그녀가 제로 코드를 가질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했다. 이유정은 마치 날 것 같이 기뻤지만 애써 냉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비밀 상점으로부터 능력치를 올렸다. 이유정은 악마들에게서 나온 아이템으로 더욱 강해졌고, 기존 능력치도 높아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 괴물 ' 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전에 겨뤘던 안현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길 수 있다. 그것도 손 쉽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이젠 다 필요 없다. 집에 돌아갈 수 있다. 천사들이 말한 대로 하다보면 집에 분명 갈 수 있다. 천사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악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천사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는가? 절대 없다. 이유정은 웃으며 머셔너리 클랜을 향했다.


이유정은 마검을 가지고 있었다. 악마와 약속을 해서 보상도 얻었다. 마지막으로, 악마의 사체를 오롯이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녀가 사랑하는 김수현을 위한 재료가 될 것이다. 왜 악마들이 이런 호의를 자신에게 보인 걸까? 왜 악마들이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을 고른 걸까? 충분히 의심할 만 했지만 이유정에게 그럴 여력은 없었다.


당시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었고, 지금은 너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악마가 굳이 서대륙의 부랑자들을 죽이고, 악마들마저 죽여 달라 했던 이유. 그리고 악마들이 왜 이유정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 마지막으로 천사들은 왜 이 모든 것들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를, 이유정은 알 필요가 없었기에 북대륙의 시원한 날씨를 기분 좋게 만끽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이유정이 머셔너리 클랜으로 향하고, 그녀가 머셔너리 클랜에 도착했을 때, 제 2차 원정대는 악마와 싸우고 있었다. 치열하게, 말이다.







현재를 합쳐, 총 두 번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을 경험하는 김수현은 악마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릇 다른 종족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서도 이번 일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뭐랄까, 불에 뛰어드는 나방 같다고 해야 할까.


악마들이 동대륙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김수현은 천사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원체 인간과 다른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니 딱 그 정도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동대륙으로 가보니 정말 악마들은 동대륙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대륙에 진입하면서 같은 인간, 인간이길 포기한 악마들과 싸우면서 김수현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악마들이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이런 계획을 세웠을 리가 없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다. 그래, 루시퍼나 사탄 같은 녀석들이 말이다.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김수현은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모두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동요를 막기 위해 미리 전부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악마들이 갑자기 이렇게 나올 리가 없다. 아마 악마들이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것일 게다. 그러므로 북대륙에서 연락이 올 경우, 동대륙을 버리고 바로 돌아가도록 한다.


약간의 동요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김수현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똑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악마 같은 녀석들과 싸워서 그런지 이미 모두가 동대륙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김수현은 차근차근 적을 쓰러트려갔다. 혹시 북대륙에서 올 지도 모를 소식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북대륙에서 소식은 오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원정의 진행을 박차던 도중, 김수현은 뜻밖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사탄이었다.


' 사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너는 이렇게까지 멍청한 녀석이 아니었을 텐데! '

' 마치 나를 잘 안다는 말투이군. '


사탄은 그런 녀석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지 않는 놈이었다. 그렇기에 김수현은 꿍꿍이를 캐기 위해서라도 재빨리 사탄을 처치하려 했지만 부하가 막아대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김수현은 도망 다니듯 싸우는 사탄과 한참이 지나서야 맞붙을 수 있었다.


' 왜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 거지?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

' 글쎄, 나를 이긴다면 가르쳐주지. '


사탄은 전형적인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돌진해왔다. 김수현은 그런 사탄과 1:1로 싸웠고, 정의의 편은 이번에도 그의 편을 든 것인지 사탄은 지고 말았다. 어쩌면 대사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비로소 원정이 끝남을 알리는 김수현의 목소리가 전장을 뒤엎자, 원정군은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모두가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고 있을 때, 김수현은 사탄의 목에 칼을 대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김수현의 질문이었을 뿐이다. 그 질문의 개수가 2자리 수에 다다랐을 때, 김수현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죽여 버리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 사탄이 입을 열었다.


' 넌 정말 이례적인 인간이다, 김수현. 보통 인간과는 달라. '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

' 인간은 아무리 중립이라 해도 선, 악으로 구분할 수 있지. 절대적인 중립은 없단 말이다. 하지만 너는 다른 인간과 다르다. '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군. 사탄에게서 더 건질 정보가 없단 걸 깨달은 김수현은 유언처럼 내뱉는 것들을 더 듣지 않기로 했다. 화정의 힘이 담긴 검을 높게 들어올린다. 사탄은 자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끝은 결국 이것이었군. 운명은 피해갈 수 없다라… 이 얼마나 슬픈 말이 아닌가. '

' 죽기 직전이라 인간처럼 감성이라도 생긴 건가. '


김수현은 검을 내리쳤다. 사탄은 죽을 때 그 어떤 비명도 내지 않았다. 사탄은 그렇게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고 죽었다. 김수현은, 사탄이 이야기한 운명이 뭔지 몰랐다.


' 악마가 모두 죽었다! 북대륙이 동대륙을 구했다! '


한 철부지 클랜원의 외침을 시작으로 모두에게서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탄의 몸을 밟고 아직까지 허공을 날고 있는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아챈다. 그리고 피 묻은 검을 검집에 넣는다. 김수현은 그 머리를 크게 들어올렸다. 모두가 보이도록 말이다.


' 원정은 끝났습니다. 이제 북대륙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남은 건 천사들이 정리해줄 것이다. 이 이상 위협적인 악마도 없었다. 다른 악마들이 있었다면 모를까, 사탄이 죽은 이상 더 위험한 건 없었다.


원정은 끝났다. 북대륙의 인간이 악마를 물리쳤고, 동대륙은 구해졌다. 다른 악마들이 분명 반대했을 건데도 사탄 혼자 동대륙에 나타난 이유. 굳이 제 힘을 깎아먹으면서 까지 나타난 이유. 김수현은 알 수 없었지만 더 그걸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악마들은 그렇다. 인간이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이기적인 종족이기에 김수현은 동대륙에 더 미련을 두지 않았다.







클랜을 나갔지만 이유정은 강해졌기에 클랜에 다시 돌아왔다. 당장에라도 김수현이 기쁘게 자신을 맞이하는 걸 기대하기 위해 일부러 눈을 감고 걸어가 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김수현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악마에게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악마의 말이라 귀담아 듣지는 않았지만 그래, 분명 그랬다.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동대륙으로 떠났다고 이야기했다. 이유정은 걱정하지 않았다. 악마가 걱정하지 말라해서 그런 게 아니다. 어느 누가 감히 제 오빠를 건드릴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미리 클랜으로 돌아가 있으려고 했다. 안현 같은 녀석이 있으면 강해진 제 힘을 뽐내기 위해서라도 미리 가있으려고 했다. 김수현이 있을 때 트러블이 일어나는 것 보다는 아무래도 없을 때 트러블이 일어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트러블을 없애는 게 막강한 제 힘이라는 것. 자아도취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유정은 기분이 좋았기에 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잔뜩 부푼 마음으로 클랜에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클랜 입구에는 경비병이 서있었다. 이유정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클랜의 증표를 보여줌으로써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클랜원이 나간 사실까지는 아직 퍼지지 않은 모양이다.


시간이 꽤 오래됐지만 경비병도 모른다. 이유정은 그것만으로도 돌아올 여지가 충분하다 생각했다. 김수현은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이유정은 달라진 게 없는 클랜 안으로 들어갔다. 클랜 안은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전부 원정을 나간 것일까. 그보다 죽은 사람이 있다던데, 누가 죽었는지 궁금했다. 이유정은 클랜에서 나와 마당 쪽으로 향했다. 마당으로 가자 예상했던 대로 묘비가 있었다. 일전에 같이 만들었던 묘비도 있었고, 갓 만든 것처럼 보이는 묘비도 있었다.


이유정은 천천히 이름을 살폈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수현을 제외하고 나서 첫 스승이라 할 수 있던 유일한 여자가 묘비에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 고연주. 』


이유정은 복잡한 마음으로 그 묘비를 바라봤다. 고연주가 죽었다. 그 강한 고연주가 죽었다. 강할 뿐만이 아니라 유능하기까지 했던 고연주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불현듯 느껴지는 인기척에 이유정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도망친 줄 알았더니 결국 돌아왔네요. "


그곳에는 제갈 해솔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갈 해솔은 많이 수척해보였다. 늘 고고하게 있던 그녀의 이미지는 온데 간데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유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다 웃기로 했다. 싱긋 웃으며, 제갈 해솔을 바라본 뒤 이야기한다.


" 강해지려고 나간 거였거든. 이제 강해졌으니 돌아와야지. "

" 뭐, 강해진 건 둘째 치고. 그렇게 돌아오면 누가 받아준다고 이야기라도 했나요? "

" 아니. "

" 보아하니 마스터를 못 잊어서 다시 온 것 같은데. 그냥 가는 게 어때요? "


제갈 해솔은 재수 없었다. 이유정이 말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제갈 해솔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존재였다. 마치 뭐든 지 안다는 듯 한 자세로 늘 사람을 대했고, 실제로 알고 있는 것도 많았다. 엄친아. 완벽한 엄친아는 아니지만 그 짜증나는 태도와 능력치를 보자면 그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 못 보던 사이에 사람이 많이 줄었네. "

" …그래서요? "

" 그냥. 하는 이야기야. "


뚝뚝 끊어서 이야기하며 이유정은 웃어보였다. 아쉽게도 묘비에 김한별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떻게 그 김한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역시나 클래스가 좋아서일까. 아니다. 묘비에는 그 허준영의 이름도 존재했다. 그렇다는 건 다른 한 가지를 뜻한다.


하지만 이유정은 과거의 케케묵은 감정을 버리기로 했다. 쿨해지기로 했다. 이제 자신이 그녀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김수현의 관심도 그녀에게 돌아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 해솔의 태도는 짜증났다. 이유정은 그럼에도 차분히 제갈 해솔에게 이야기했다. 물론 말투가 차분한 건 아니다.


" 너하고는 딱히 말하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을 불러줄 수 있을까나? "

" 싫은데요. "


제갈 해솔은 그녀답게 이야기했다. 이유정은 와락 인상을 구기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짜증난다. 별 것도 아닌 년이 이렇게 앞에서 알짱거리는 게 싫다. 특히 저 눈. 마치 하찮은 인간을 보는 듯 한 눈이 매우.


" 좆같네, 진짜. "

" 무슨… 꺄악! "


마검을 역으로 쥐고 휘두른다. 목을 노린 마검은 허무하게도 허공을 갈랐지만 베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아주 약간의 피가, 마검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갈 해솔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이유정은 쓰게 웃었다.


" 그러게 진작 말하는 걸 듣지 그랬어. 좆같게 하지 말고 말이야. 네 태도, 다른 사람들이 엄청 싫어하는 거 알지? "

" 하! 나갔다 돌아오더니 완전히 미쳤군요? 나에게 훈수 두는 당신이 오히려 더 미움 받는 거 알련가 몰라? "

" 잘 알아. 잘 아니깐. "


그 입 닥쳐. 이유정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재빠르게 바닥을 차고 제갈 해솔을 향해 돌진했다. 제갈 해솔이 놀라 마법을 사용하려 했으나 이유정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마법을 외기 전에 검을 앞으로 내찌른다. 당황해서 몸을 비틀 때, 궤도를 바꾼다.


푸욱!


징조 없던 살인은 오롯이 제갈 해솔이 짜증난다는 이유만으로 이뤄졌다. 허리에 박힌 검을 보며 제갈 해솔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이유정을 바라봤다. 이유정은 검을 빼내 그 눈을 향해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그 찰나의 순간, 제갈 해솔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 급했던 모양이네… 그 정도밖에 도망도 못 가고. "

" 당신… 천사를 속이고 악마와 거래를 한 거야?! "

" ……. "


제갈 해솔의 말 한 마디에 이유정의 태도가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장난으로 공격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죽이려고 아주 작정을 한 것이다. 이유정은 검을 공중에 한 번 던진 뒤, 제대로 받았다. 그리고 검을 무마했다. 제갈 해솔이 크게 떠는 게 느껴지는 듯 했다.


"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오빠가 이런 거 몰랐으면 하거든. "


제갈 해솔은 위험한 여자다. 제 편이 될 수 없는 년이고, 언제라도 배신을 할 수 있는 년이다. 사실, 그녀가 왜 머셔너리 클랜에 온 건지 이유정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위험한 년은 아무래도.


" 너, 죽어야겠네. "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않고, 이유정은 검을 휘둘렀다. 제갈 해솔은 계속해서 흐르는 피에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이유정이 땅을 박차자마자 크게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의 입이 크게 벌려졌다. 누구라도 부를 모양인가보다. 이유정은 그것을 막기 위해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 꺄아아아─── 아으……. "


비명소리가 울리다 바람 빠진 풍선 소리마냥 뭉개지기 시작했다. 일이 틀어져버렸다. 이럴 줄은 몰랐다. 설마 악마하고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이유정은 인상을 쓰며 죽어가고 있는 제갈 해솔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약 맞은 벌레마냥 바닥에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 아, 좆같다. 정말. "


잘해보려고 다시 왔는데. 잘할 수 있다 생각하고 다시 온 건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제갈 해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라도 있던 걸까. 악마라는 말을 다시 듣게 되자, 그것도 같은 사람에게 듣게 되자 이유정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발아래 고인 핏물로 인해 거짓말처럼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 날 안솔은 불안하단 이유로 밖에 나가있었다. 신전에 가서 담당 천사를 만나 이야기를 할 것도 있었고, 꿀꿀했던 기분을 풀기 위해 맛있는 것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김수현이 옆에 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김수현은 있지 않았다.


왜 불안했을까? 김수현의 말 그대로 이번에는 자신의 능력치 ' 운 ' 이 어떤 위험도 있지 않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렇지만 안솔은 불안했다. 아무래도 원정 때의 충격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김수현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안솔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물론 오늘은 클랜에 있지 말아야지, 라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기에 그걸 그대로 행한 것도 이유가 되겠다. 어쨌거나 안솔은 오늘 클랜에 없었다. 약간 멀리 가 있었다.


한편, 김한별은 클랜에 있었다.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김한별에게 바깥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뜨면 쓰린 몸을 여러 번 만지작거렸고, 김수현이 없는 걸 깨달을 때쯤이면 씻으러 움직였다.


밥을 먹은 뒤에는 생각을 했다. 마법사들은 본디 잡념이 많다. 이 기회에 그녀는 모든 것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말이다. 그리고 곧 돌아올 김수현을 웃으며 맞이할 날을 스스로 생각하며 웃었다.


물론 기분이 나지 않는 웃음은 그저 작은 실소였을 뿐이다.


그러기를 며칠 째, 문득 김한별은 생활 패턴을 바꿨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창문을 열어 놓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날씨가 추워 그녀는 조금 더 침대에 머물렀다. 생각에 빠지기보다는 조금 더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등을 타고 흐르는 오싹한 기운이 그녀를 일깨웠다.


바람의 한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그녀는 씻으러 움직였다. 따뜻한 물을 오랫동안 맞고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기분이 좋아지니깐.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의미 있는 행동이 뭐가 있겠는가.


지나가다 안솔의 방에 들렀으나, 그녀는 없었다. 김한별은 안솔이 나갔음을 눈치 챘다.


씻은 다음에 김한별이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무료함과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까, 생각을 하며 김한별은 씻는 것을 끝마쳤다. 그 순간 아래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쾅─!

" 이건…? "


머셔너리 클랜이 습격 받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죽을 정도로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약하지 않다. 수상하다 생각한 김한별은 재빨리 창문으로 밖을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반대쪽인가? 반대쪽 창을 향해 김한별이 달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아──.


달리는 도중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이 확실하다. 김한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머셔너리 클랜원 대부분은 지금 원정에 나가 있다. 굳이 자신들에게 싸움을 걸 존재가 없단 말이다. 남아 있는 일부 인원들을 죽여 봤자 머셔너리 클랜은 쓰러지지 않는다. 인질을 잡는다고 해도, 김수현의 성격상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맹렬히 생각하는 가운데, 반대쪽 창에 도착했다. 김한별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는 제갈 해솔이 보였고, 그 앞에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여자가 한 명 보였다. 인상착의가 눈에 띤다. 하지만 전에는 분명.


" 아. 다른 사람 왔잖아. 이러면 곤란하다고. "

" 유정이 언니?! "


제갈 해솔이 꿈틀거리는 것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김한별은 혼란에 빠졌다. 이유정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어딘가 달라 보인다. 예전부터 머리카락이 붉어 괴리감이 느껴지긴 했다. 아마도 그 이유라면 제 머리카락이 푸른색에 가깝다는 우스운 농담 때문일 게다. 하지만 지금은 뭐랄까, 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더 붉어졌다 설명해야 할까. 옷에 제갈 해솔의 피가 묻은 게 눈을 재차 끔뻑거리며 몸을 떨 뿐이었다. 김한별은 제갈 해솔과 이유정을 번갈아 쳐다봤다.


" 누가 왔나 했더니…… 너구나? "

" 무슨…! "


이유정이 땅을 박차고 건물을 향해, 김한별을 향해 뛰어올랐다. 이 거리로는 절대 올 수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유정은 손쉽게 그녀가 있는 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몸놀림. 아직 몇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제갈 해솔의 죽음 이전에, 김한별은 이유정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마법을 사용한 뒤 이유정과 거리를 벌렸다.


" 이게 대체 무슨 짓이죠?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

" 알아서는 안 될 걸 알아버렸거든. 그런데 지금 그걸 신경 쓸 상황은 아니지 않아? "


마검을 휘두른다. 처음에는 느리게. 머셔너리 클랜에 있을 때의 움직임으로 이유정은 김한별을 공격해갔다. 효율적인 공격법은 김한별의 목을 노리는가 싶으면 다리를 노렸고, 김한별은 능숙하게 움직이면서 그 공격들을 막아냈다. 이유정이 지나치게 여유로운 건 의외였지만, 그리고 제갈 해솔이 어떻게 죽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습이라면 이 상황이 이해됐기에 김한별은 아주 약간, 마음의 끈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얼른 이 소란을 눈치 채고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빌었다. 제갈 해솔을 신경 쓰기엔 이유정이 눈을 부라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그렇게 15번 정도의 공방이 오갔을까, 마법사이기 때문에 체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김한별이 숨을 작게 흩뜨렸을 때, 이유정이 재빠르게 그녀에게 접근했다. 마검으로 목을 노린다. 방어막에 막힌 마검을 더욱 강하게 힘을 준다.


끼기긱!

" 마, 말도 안 돼! "


힘으로 방어막을 일그러트린다. 당황해 팔이 떨고 있는 김한별의 다리를 강하게 찬다. 뿌득, 하고 뼈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린다. 월등히 높은 능력치 차이 때문이다. 김한별의 팔이 떨어지고,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닥과 몸이 부딪치려는 그 순간, 이유정이 한 번 더 다리를 움직였다. 마검의 옆날로 김한별의 머리를 친 뒤, 옆으로 넘어지는 김한별을 찬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쿨럭이는 김한별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정은 비릿하게 웃으며 숨을 헐떡이며 일어나려는 김한별에 가까이 갔다.


" 말도 안 되게 약하네. B등급이 D등급한테 이래도 되겠어? "

" 아직도 그런 걸 마음… 아흑! "


검으로 김한별의 옆구리를 찌른다. 말을 하다 말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김한별의 모습은 봐줄만 했다. 이상하게도 제 아래에 B등급인 김한별이 깔린 채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있자, 마음이 고양되는 것만 같았다. 통쾌함. 후련함. 그런 종류의 감정이 온 몸을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이유정은 웃으며 검을 빙글빙글 돌리다, 다시 뽑았다. 김한별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 솔직히, 통과 의례 때부터 같이 있었던 내가 이런 신세를 받는 게 이상하지 않아? 처음엔 C등급이더니, 안현만 강하게 해줬으면서 D등급으로까지 내리다니. 너무하다 생각되지 않아? "

" 그건 언니가, 꺄악─! "

" 언니라 하지 마. "


이 순간에도 김한별은 언니라는 말을 꼬박 사용했다. 이유정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을 눈 바로 앞에 내려찍으며 겁을 준다 .김한별의 비명이 클랜 내부를 강하게 흔들었다. 저 멀리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정은 재차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는 마음에 귀찮아졌다.


" 생각해보니깐 너희들과 나의 차이점이 하나더라고. 솔직히 클래스 때문에 내가 지는 거지. 능력치도 완전 공짜로 얻어놓고 너무한 거 아니야? 응? "


멀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머셔너리 클랜이 등급제로 바뀐 뒤 수발을 듣는 하인들이 오는 소리인 것이다. 이유정은 감지로 머셔너리 클랜원이 정말 몇 없단 걸 알 수 있었다. 안솔도 있지 않았다. 그 잘난 EX등급의 사용자이시니깐 김수현과 같이 나간 게 아닐까?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다 해도 연적은 연적이었다. 안솔은 다른 여자와 달리 자신처럼 김수현에게 그리 관심 받지 못하는 응석꾸러기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유정은 안솔이 김수현과 같이 갔다 생각하니 질투가 났다.


" 그래도 이제 너 같은 건 쉽게 이길 정도로 강해졌으니 오빠가 더 이상 그런 년들하고 안 어울리겠지? 아. 이미 뒤져버려서 어울리지도 못하나? 하하! "

" 미친……. "


서대륙에서의 살인 끝에 이유정은 원하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악마면 어떻고, 천사면 어떠랴. 원하던 것을 가져다 준 존재가 이유정에게는 천사이고, 곧 정의였다. 더 김한별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지자 이유정은 재차 검을 김한별의 목에 찔러 넣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제갈 해솔처럼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눈동자로만 의사를 표현할 뿐이었다.


" 시시하네. "

" 이, 이게 무슨……?! "


뒤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히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클랜원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차가워진다. 너무나도 약하고, 약하기에 죽은 김한별을 바라본 이유정은 일말의 시선도 더 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뛰어갔다. 1차 원정의 생존자 둘은 그렇게 죽었다.







동대륙을 구원하고 김수현은 북대륙으로 돌아왔다. 사탄의 행동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었으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한소영의 도움이 컸다.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 게 별로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김수현은 인상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의 형인 김유현도 마음에 든 모양인지 활짝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모든 일행을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그렇게 김수현은 더 이상 악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럴수록 제로 코드를 얻기 쉽다. 오히려 악마들이 이런 미친 짓을 해주는 게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몸은 바빠도,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어도 전투를 할 때면 모든 걸 잊을 수 있다. 광기에 잠식당하는 일은 없으나, 김수현은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면 전처럼 살육을 행할 마음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생각을 클랜원들이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의 지루한 행군이 끝나고, 김수현과 일행들은 모두 북대륙으로 돌아왔다. 북대륙에서도 흩어져 있던 클랜들이라 몇몇 클랜들은 곧바로 그들의 도시로 돌아갔다. 이스탄텔 로우 클랜과 해밀 클랜은 원정이 끝난 기념으로 함께 축제를 하기로 했다. 머셔너리 클랜은 흔쾌히 수락했다. 클랜에 남아 있는 인원이 우울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 축제를 해야 한다면서 두 클랜이 김수현을 꼬셨다.


결국 김수현은 피곤한 마음에 쉬고 싶었으나 팔자에도 없던 축제를 하게 되었다. 전처럼 머셔너리 클랜만 축제를 하는 거라면 도망칠 명목이라도 있었겠으나, 김유현과 한소영이 붙잡으니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악마를 잡았다. 그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이런 축제를 원하는 건가. 김수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 머셔너리 클랜으로 가 있어라 이야기했다.


어차피 대부분의 클랜이 모든 클랜원을 전투에 투입시켰기에 따로 더 부를 사람은 없었다. 아. 있다면 이효을 정도? 하지만 아직까지 일하고 잇을 텐데 초대할 수 있을까나. 김수현은 잠시 고민하다, 우선 신전에 들리고자 마음먹었다.


" 그럼 저 혼자 신전에 가서 보고하고 올게요. "

" 그렇게 말하고 안 오면 알지? "

" 하하……. "


김수현은 어설프게 웃으며 김유현이 말하는 걸 넘겨버렸다. 김유현은 눈을 부라리며 그를 쳐다봤으나, 안타깝게도 김수현은 더 거기에 없었다. 김수현은 재빠르게 신전으로 도망쳤다. 오랜 여정이었다. 총 두 번의 원정. 길면서도 짧았던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모두 강해졌다. 이제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들을 되찾는 것 같기도 했다. 동대륙 곳곳에 퍼진 악마를 처리하기 위해 인원을 나누기도 했었으니깐.


신전에 간 뒤 빠르게 절차를 통과하고, 김수현은 세라프를 만날 준비를 했다. 원래라면 그녀를 만날 생각은 없었으나, 아무래도 악마를 처치했다는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만날 필요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축제에 늦게 가겠다는, 지대한 사명도 있다. 아마 지금쯤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세라프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아마 다들 취해있겟지.


그런 소소한 행복을 생각하며 김수현은 세라프를 만났다.


" 사용자 김수현! "

" 그래. 나 김수현 맞으니깐 그렇게 크게 안 말해도 돼. "

"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큰일 났습니다! "


또 무슨 큰일이야. 매번 같은 레퍼토리로 접근해오는 세라프가 이제는 귀찮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사실 매번 큰일이라는 핑계로 일을 시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다급해보였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표정 변화였지만 세상에 그 어떤 일이라도 악마가 대륙에 나타났단 것보다는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김수현은 세라프의 말을 추측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당장 클랜으로 돌아가세요.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

" 보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면…. "

" 빨리요! "


세라프가 크게 소리쳤다. 김수현은 그제야 일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클랜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건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그림은 매우 잘 그려졌다.


사탄이 동대륙에 나타난 이유를 생각해보자. 목숨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낼 정도로 무슨 꿍꿍이가 있던 걸까. 북대륙이 빈틈을 타서 악마들을 소환시킨다. 그리고 북대륙의 기반을 무너트린다. 현 전력으로는 북대륙이 가장 강하다. 그래서 한 몸 희생해 북대륙의 진격을 늦추려는 계획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동안 새로운 계획을 짜고 말이다.


또 다시 동료들이 죽는다. 김유현과 한소영도 죽는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강하다. 악마들이 무리해서 북대륙에 나타난 거라면 질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김수현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곧바로 있던 장소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사용자 김수현! 부디 신중하게 판단하세요. 감정적으로 생각하ㅁ──. "


세라프의 말을 뒤로한 채 클랜으로 향한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인 김수현은 얼마 가지 않아 클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김수현은 피를 흘리고 있는 안현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안현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는 이유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level.3 사용자 태사냥

늘처음처럼

성별
직업
용병
성향
레벨
Lv.3
경험치
2000 EX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