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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 1
level.3 태사냥
  • 2016-03-27 16:45:54
  • 조회수 1868
  • 추천 3
  • 댓글 3

글을 들어가기에 앞서,

 

※ 이 소설에는 전개를 위한 억지성이 존재합니다. 이 점, 유의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아무래도 설정 상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사정 상 글을 제대로 풀어적지 못했습니다.

※ 좀 깁니다.

※ 분량이 많아 한 번에 올릴 수 없어 이어진 게 어색할 수도 있는데, 이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위대한 천사 루시퍼는 무슨 연유로 타락했을까? 일면에서 이야기하듯 신의 총애를 받는 것도 모자라 신이 되고 싶어 욕심을 부려서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를 악마의 길로 유혹해서일까? 그렇다면 천사 루시퍼가 혹했을 정도의 유혹은 무엇이었을까?

 

천계에서의 모든 권한을 뿌리치고 악마가 된 루시퍼는 지나칠 정도로 천사들에 대한 증오를 보였다.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에 한때나마 동료였던 자를 공격하지 못했고, 그 시간은 루시퍼에겐 기회가 됐다고 한다. 학살이라 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잔인한 루시퍼의 행보는 결국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끝은, 주 적인 천사가 아닌 인간이 이룰 것이고 말이다.

 

『 머셔너리 클랜, S급 용병의 저서 中. 』

 

 

 

 

 

 

암흑만이 가득한 방 안은 응당 그래야 할 것처럼 조용했다. 좌우 각각 3개씩 놓여있는 의자에 있는 인물은 때때로 움찔거리기도 했으나 가운데, 단 하나의 인영은 미동도 없을 정도로 침묵을 고수했다.

 

그런 고요한 순간이 지루하다 생각될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가운데 앉은 악마가 입을 열었다.  그는 ' 모든 악마의 왕 ' 혹은 ' 적대자 ' 라고 불리는 사탄이었다.

 

" 슬슬 다 모인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

 

사탄의 말을 시작으로 그가 주도한 회의가 시작됐다. 전에 있던 루시퍼의 공간에서와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었지만, 칠흑같이 어둡다는 점은 악마다울 정도로 똑같았다.

 

"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우리 모두를 부른 거죠? "

" 대계의 예언을 두고 나는 한참동안이나 고민을 했다. 너희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 말이야. "

" 그거라면 벌써 끝난 이야기 아니야? "

 

아스타로트가 따분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말한 뒤 다급하게 입을 닫았다.  그가 누구의 눈치를 본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나 그만큼 지금 사탄의 기운은 흉흉했기 때문에 아스타로트는 헛기침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사탄은 그런 아스타로트에게 직접적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대화의 주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 먼저 죽은 마몬의 희생으로 나는 김수현의 힘을 분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 고작 인간이 다루는 불으로 악마를 한 번에 없앤다? 나는 그런 불가능한 일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

" 그렇다는 건 김수현이 다루는 힘은…. "

" 훨씬 고차원의 힘이라는 말이지. "

 

악마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스모데우스는 그 때의 일이 생각나는 듯 더욱 심하게 표정을 일그렀고, 사탄은 그런 악마들의 기분따윈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 때때로 인간이 보여준 능력들은 놀랍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로 기상천외한 능력을 보여주며, 때때로 그들보다 지능이 높은 종족도 뛰어넘을 정도의 인간이 나오기도 한다. "

" 잠시만. 그렇다면 김수현을 죽일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거야? "

" 아니. 김수현을 죽일 녀석은 없다고 나는 판단했다. "

" 농담. 재미. "

 

지독하게도 재미 없는 농담이다. 다른 악마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려다 그가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결국 경악하고야 말았다. 저 사탄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전에 없던 발언에 루시퍼는 마치 인간마냥 손을 들어 발언권을 주장했고, 사탄은 눈짓으로 그걸 허용했다.

 

" 그렇다면 사탄은 다시 한 번 대계의 예언에 따라 도망치자고 말하려는 겁니까? "

" 맞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

"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사탄은 감내하기 싫었는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마치 전과 똑같이 영상을 보여줄 것처럼 허공을 손으로 휘저었지만, 허공에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시선이 돌아가서인가, 사탄은 말을 계속했다.

 

" 김수현 혼자 마계에 온다 하면 나는 그를 죽일 자신이 있다. 모두 그렇겠지. 그리고 김수현과 그의 동료들이 지금 마계에 쳐들어온다 해도 나는 그들을 죽일 자신이 있다. 너희들은 어떠한가? "

" 마계에서 싸운다면… 문제될 건 없겠죠. "

" 나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

 

다른 악마들도 모두 동의한다. 사탄은 여유로운 미소로 마지막 질문을 내던졌다.

 

" 그렇다면 김수현과 그 동료들이 지금보다 강해져서 마계에 온다면 너희들은 이길 수 있다 자신할 수 있는가? "

" 그건…! "

 

아스타로트가 확실하게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른 악마들도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김수현의 힘. 악마의 목숨을 불태워버릴 정도의 힘과 일전에 봤던 동료들의 힘. 그 힘들이 더욱 성장하여 자신들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100%라는 확률을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 대 다수의 전투. 그런 전투에서의 확률을, 자신하지 못했기에 악마들은 사탄을 맹목적으로 쳐다봤다.

 

" 나는 자신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겠다. "

" 악마들의 연합을 이야기하는 거일려나? "

" 김수현 한 명을 위해? 그렇다면 달리 묻겠다. 너희들은 김수현을 제외한 다른 녀석들이 성장해서 마계로 왔을 때, 이길 자신이 있나? "

 

사탄의 말에 바알이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실수임을 깨닫고 사과의 제스쳐로 손을 흔들었지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타로트가 그런 바알을 대변하듯 말을 꺼냈다.

 

" 그럴 리가 있겠나. 김수현이 없는 놈들은… 약하다. 그것도 한심할 정도로 말이지. "

 

사탄은 아스타로트의 말을 끝으로 그의 목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고심했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 지금까지 우리의 계획을 저지한 인간은 오로지 김수현 하나뿐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거슬리는 놈이라 할 수 있지. 그렇지만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그 녀석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

" 그건 다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 주지 않겠어? "

 

리리스의 건방진 말투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할 뿐이었다. 그의 눈은 결의에 찬 듯 했다.

 

" 이미 모든 계획은 김수현에게 저지당했다. 악마를 소멸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녀석을 나는 더 막을 수 없다 판단해, 지금 자리에 있는 너희들에게 김수현에게의 복수를 제안한다. "

 

악마들이 크게 술렁였다. 사탄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건지 아스타로트는 기가 찬다는 듯 한 표정으로 삿대질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태에서도 사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그의 주장을 이야기했다.

 

" 복수라고 하니 치졸해보이나? 그렇다면 말을 바꿔주지. 나는 너희들에게 북대륙의 멸망을 제안한다. "

" 그거. 진심. "

" 당장에 이해가 가지 않겠지. 그러니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내가 생각한 계획을 이야기 해주겠다. "

 

그렇게 본론이 시작됐다. 모든 악마의 왕이라 불리는 사탄이 세운 계획. 오로지 단 한 명의 인간 때문에 세운 계획은 그렇게 다른 악마들에게 충격을 심어주었고, 단 한 명의 악마만을 제외한 모두가 기꺼이 이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이 한 명의 악마는 후에, 김수현이란 인간과 동료 한 명의 손에 처참하게 죽게 된다.

 

 

 

 

 

 

안현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뒤 이유정은 굴욕적인 C등급에서 더 하락해, D등급이 되었다. 통과의례의 원년 멤버중 혼자만 D등급이다. 안솔은 때때로 이런 이유정을 가엾다는 듯 쳐다봤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유정은 오히려 그런 값싼 동정이 더욱 굴욕적이었다. 클랜에서의 따가운 눈초리가 비단 자신한테만 날아오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고, 그게 다 혼자만의 착각이라 생각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이유정은 그 좋았던 클랜마저 있기가 싫어졌다.

 

등급이 매겨진 뒤로 혼자 있을 때, 이유정은 가끔씩 옛날을 회상하곤 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김수현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좁았기에 모두가 알 수 있었던 사랑을 거짓말 같이 대상은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기뻤다.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 그게 김수현이었으니깐. 혹독하면서도 늘 자신들을 생각해주는 김수현은 어쩔 땐 거짓말같이도 귀여웠고, 어쩔 땐 거짓말 같이 무서웠다.

 

가끔은 굳이 이런 훈련을 하면서까지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적은 갈수록 강해진다. 그 적에게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으면, 모든 게 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김수현이라는 존재가 뒤에서 자신을 혼냈고, 안일한 생각을 져버리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도와주고, 살려준 사람은 김수현이다.

 

행복한 상상은 언제나 미소를 자아낸다. 그 시절의 자신과 김수현, 그리고  나머지 둘은 늘 웃고 있었다.

 

" 그런데 어째서……. "

 

드문드문 내뱉는 말에는 울음이 섞여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은 방음이 잘 되서 좋다. 이유정은 지금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추잡하게 살을 부대끼는 소리도, 제 울음소리도 아무한테나 들리지 않았기에 이유정은 제 방에서 목 놓아 울 수 있었다.

 

한탄 같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애증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랑하는 김수현을 이유정은 차마 감정으로 평가하기 어려웠다. 그래. 자신이 이런 취급을 당해도 이유정이라는 인간은 김수현이라는 인간을 좋아하는 것이다.

 

원망과 체념이 어까지 반복될지 몰라 스스로의 감정에 질리려고 할 때, 이유정은 클랜이 떠들썩한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굳이 감지하거나, 신경을 쓰지 않아도 클랜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그게 곧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었기에 이유정은 잠시 갈등하다,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물을 머금은 것 마냥 옷이 무겁게 느껴졌고, 피곤한 몸은 끊임없이 고통을 이야기했지만 이유정은 없던 의욕도 근성으로 짜내며 제 방에서 벗어났다. 방에서 벗어나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금방 전까지 왜 우울하게 있었지, 하고 생각 될 정도로 시원한 공기는 기분 좋게 그녀를 맞이했다. 이유정은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저 멀리 김수현이 보여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느껴지는 클랜원들의 따가운 눈초리는 금방 전까지 좋았던 기분을 모두 떨쳐버릴 정도로 불쾌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제 성질대로 화를 내게 만들었지만 공간을 감도는 약간의 취기를 친구삼아 이유정은 분을 삭였고, 말없이 자리에 앉아 술을 들이켰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취했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이다. 그저 조금만. 아주 약간의 술과, 안주로 지친 몸을 달랠 뿐이다.

 

힘들 때면 언제나 술은 자신을 도와줬으니깐. 이유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 자. 그럼 모두 조용히 해주시고. 클랜 로드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그녀였다. 고연주의 목소리에 모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조용히 그녀를 쳐다봤다. 몇몇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조용히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이유정은 그게 참 신경에 거슬렸다.

 

- 마법사 클래스 중에서, 사용자 사라 제인과 대련을 희망하시는 분?

" 저요! "

 

맑고 고운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바로 옆에서 외친 것 마냥 큰 목소리가 제게 인상을 쓰게 만들었지만 이유정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슬아슬한 마음은 이러한 것보다는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손을 든 자는 제갈 해솔이다. 김수현이 직접 데리고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재능 있는 마법사 클래스의 사용자. 뭐, 머셔너리 클랜에 있는 이상 재능이 없다는 게 더욱 우습겠지만 말이다.

 

이유정은 제갈 해솔이 손을 들고, 사라 제인이 약간 몸을 떨었을 때 상황을 오롯이 이해했다. 신입 클랜원이 있다. 등급제로 바뀐 클랜은, 예전이었다면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다. 이유정은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둘 다 여자였다. 그것은 신경이 많이 가는 일이었으나, 못내 쿨한 척 그걸 넘겨버리고 다른 점을 주목했다. 클랜 내 마법사의 부족 때문인가, 사라 제인이 클랜에 들어온 건 이유정이 봐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 3, 2, 1, 0!

 

이벤트가 시작됐다. 먹고 떠드는 축제에서 이유정에게는 유일하다 할 수 있는 유흥거리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시작됐고, 그 유흥은 지레짐작 했듯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결이 끝나자, 이유정은 문득 그녀의 술잔이 비어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는 지금보다 더 비참한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제 근처에는 술잔에 술을 따라줄 동료마저 없는 것이다. 고개는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천천히,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마냥 아래로 내려갔고, 뒤이어 들리는 고연주의 말에 잔인하게도 다시 위로 올라왔다.

 

- 그럼 용병 클래스 중에서….

 

찌릿하단 기분이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신입으로 들어온 여자는 어리버리해보였다. 아직까지 이 클랜의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인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상기된 얼굴은 언제까지라도 붓기가 빠지지 않을 것 같아보였다. 아. 적응을 못한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쓸모없는 D등급과 신입의 대결. 텃세를 놓는 것은 아니지만, 이 비참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다. 승리에 도취되거나, 자만하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그저 이 비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한 단 한 명의 제물. 이유정은 차분히 상대를 노려봤다. 김수현은 아직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니, 벌린 입이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았지만 그 말이 왠지 자신을 울릴 것 같았기에 이유정은 아예 귀마저 막아버렸다.

 

- …시작!

 

이유정은 달렸다.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쳐나갔고, 그 어느 때보다 지친 몸으로 카타나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 공격은, 부질없었다. 상대의 어깨는 어째서인지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이유정은 그런 것에 의문을 갖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 그리고 김수현의 주위에는, 재능이 넘치는 자들이 차고 넘치기에.

 

휘둘러지는 카타나가 문득 느려진다는 생각을 한다. 이유정은 그렇게,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니깐 이유정은,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패배했다. 마지막에 김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동안의 설움이 봇물 넘치듯 터져 나왔고, 그것을 견디지 못해 방으로 도망쳤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방으로 도망쳤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돌아온 것을 깨달은 이유정은 그제야 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위로하러 와줄 사람도 없다. 답답한 마음으로 방 안에 있어봤자 풀릴 건 아무 것도 없다고 판단한 이유정은 차라리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바깥을 돌아다니겠다는 마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간 이유정은 막다른 길에서 돌다 황급히 놀라며 벽을 등지고 숨었다.

 

또각. 또각.

 

김한별이 4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유정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몸은 본능적으로 가지 말라 말하고 있지만, 이유정은 오기로라도 이유정의 뒤를 밟았다. 들킬 염려는 없었다. 마법사와 용병. 싸우는 방식의 차이. 그것은 꽤나 크다. 아무리 천대받고 있는 이유정이라도, 고연주에게 훈련 받은 것도 있기에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유정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 우선 들어와. "

 

김수현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어서 김한별이 눈앞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음에도 이유정은 만끽하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김한별은 김수현의 말을 듣고 방문을 조금 닫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꽉 닫히지 않은 방문 안에서 불현듯 높은 음의 목소리가 새로이 들려왔다.

 

" 끼약! "

" 하하…. "

 

웃음소리가 공중에서 조용하게 흩어졌다. 김한별의 당황하는 목소리는 제 귀를 썩 즐겁게 해주었으나 그 다음 것은 그러지 않았다. 이윽고 김한별이 김수현에게 뭐라 이야기하는 게 들려왔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듣는 것만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유정은 상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아무런 터치도 안 한 김수현이 김한별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이유정은 그 생각을 하는 것 대신 저 둘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 사이에서 이유정은 김한별에 대한 증오가 더 깊었기에 이러한 행동을 선택한 것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김수현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이유도 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김한별에게 김수현은 다정하니깐 말이다.

 

슬그머니 문에 다가가 둘에 이야기를 엿듣는다. 둘의 목소리 중에 김한별의 목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꽤나 짜증날만한 일이었다.

 

" 유정이 언니, 왜 이렇게 된 거예요? "

 

그러니깐, 뭐라고 해야 할까. 이유정은 김한별이 자신을 평가하는 게 싫었다. 같이 홀 플레인 세상에 들어온 김한별은 가장 먼저 김수현을 떠난 년이었고, 김수현이 유명해지자 다시 들어온 년이었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평가하는 게 이유정은 첫째로 싫었고, 여자로서의 촉이 김한별을 거부했기에 두 번째로 싫었다.

 

화나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다시 대화를 엿듣는다. 김한별은…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녀와 자신은 앙숙이니깐. 견원지간(犬猿之間). 그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유정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 유정이 언니가 괜찮은 사용자, 좋은 사람이라고요? "

 

가냘픈 목소리는 제 심성을 의심하는 듯 했다. 이유정은 이것도 참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김한별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자신을 비하하는 것. 그래, 그런 일은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유정의 이성은 꽤나 냉정했기에, 조금 더 대화를 들어보기로 했다.

 

"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이해가. 사실 오늘 이벤트는──. "

 

김수현이랑 오래 지내본 이유정은 고작 김한별의 말 따위에 그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을 수 있었다. 언제나 놀라운 판단력과 결정력으로 모두에게 신뢰받았으니깐. 이번에도 김수현은 김한별을 그냥 뿌리칠 수 있다.

 

이유정은 다시금 뜨거워지는 머리를 식히느라 애썼다. 마음으로는 지금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김한별에게 카타나를 휘두르고 싶었으나 얼마 안 남은 이성이 그러지 말라며 말리고 있었다. 김수현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는가? 계속해서 실망시킬 수는 없다. 분을 삭이고, 다시 대화에 집중한다. 아주 작은 문틈 사이로 김수현의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실소하고 있었다.

 

" 미친년이야. 피에 미친년. 광년으로 불렸다고. "

 

과거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 걸까. 으레 군대 나온 남자가 이야기하듯 무용담이라고 펼치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 년 ' 이라는 뚜렷한 명사가 제 카타나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특수 능력이, 발목을 잡았다. 가까스로 쥔 카타나를 떨어트릴 정도로 손에 힘이 쥐어지지 않았다. 김한별의 표정이 김수현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녀는 웃고 있을 것이다. 이유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득 김한별이 앉아 있는 곳이 눈에 거슬렸다. 이유정은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대화를 엿들었다. 김수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있었다.

 

" 뭐하고 있는 거지? "

" ……! "

 

' 엿보고 있다. ' 라는 생각에 말은 나오지 않았다. 고요한 음성은 제 귀에 부드럽게 들려왔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이유정은 재빠르게 카타나를 휘두르려고 했다. 반쯤 휘두른 카타나가 상대의 목 근처로 갔을 때, 이유정은 상대방이 허준영임을 깨달았다.

 

" …보면 몰라? "

" 그런 의도로 물은 게 아니란 걸 알지 않나? "

 

허준영과 말싸움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유정은 힘빠지게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그녀보다 더 잘 들을 것이라고 판단됐다. 그렇게 허준영이 바라보는 순간, 김수현의 말이 들렸다.

 

" 하기야. 몇 번 쓰다 버릴 도구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

 

고개를 돌리자 허준영은 꽤나 당황스러워보였다. 그가 언제 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걸리지 않았다고 이유정은 장담할 수 있었다. 슬슬 밑에서 들리는 소음이 적어질 무렵이었다. 이유정은 두 말 하지 않고 밑으로 달려갔다.

 

" 자, 잠깐…! "

 

허준영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허준영은 이유정을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첫 번째로는 이유정에게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기운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건드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유정은 손쉽게 허준영의 손에서 벗어나 제 방으로 달려갔다. 숨소리에서는 벌써부터 울음이 느껴졌다.

 

애써 바닥에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눈가를 훔치는 손목은 허준영이 보기엔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허준영은 그 발악을 한참이고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때버렸다. 문득 그는 목적이 달라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 쯧.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

 

허준영은 알고 있었다. 김수현의 여자 사정이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한 명은 제 풀에 지쳐 떨어져나갈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한 명은 그와 관계하지 않은 사람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허준영은 김수현을 보고 클랜에 들어왔다. 여자가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닌, 남자로서 순수한 감정으로.

 

그리고 이유정은 금방, 김수현의 말을 듣고 도망쳤다. 이유정은 김수현의 희생양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누가 봐도 현재 폭풍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번개를 다스리는 뇌제 ' 김유현 ' 도 아니고, ' 김수현 ' 이다. 그건 여자관계 뿐 아니라 실질적 사정에도 말이다.

 

"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

 

유난히 오늘따라 허준영은 스스로가 말이 많다고 생각됐다. 김수현답지 않게 보이는 한심한 대처 때문일까. 여자관계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김수현은 무지하고, 야박하다. 한 명의 남자로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문득 그는 안현이 생각났다.

 

물론 그것도, 허준영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이야기.

 

허준영은 김수현을 만나러 가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오늘 그는 술을 마실 생각이다. 평소보다 많이. 이미 축제에서 도망쳐버린 한 명의 여자를 대신해서 많이 마실 셈이다.

 

 

 

 

 

 

" 그러니깐… 유정 언니가 클랜을 나갔다고요? "

" 보이지 않기에 찾아봤더니 방에는 이미 아무 것도…. "

 

허준영의 예상대로 이유정은 떠났다. 허준영은 비록 단편적인 내용. 극히 단편적인 내용만 들었다지만 이유정이 떠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클랜원들, 그러니깐 초창기에 있었던 클랜원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고연주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김수현은 이 자리에 없었다. 허준영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다, 몸을 움직였다.

 

" 어제 마지막으로──. "

 

고연주는 수시로 클랜 주위를 정찰한다. 이유정은 고연주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이유정이 어떻게 고연주의 눈을 피하고 밖으로 나갔을까? 허준영은 당장에 이유정이 나간 사실보다 그게 더 궁금했다. 아니면 어제 고연주가 취해서 순찰을 가지 못했나?

 

" 무슨 일이지? "

 

얄팍한 추측은 재빠르게 끝났다. 싸구려 소설 같은 추측이 끝난 게 아쉬웠던 건지 허준영은 혀를 찼다. 그리고 늦게. 가장 늦게 등장한 김수현을 바라봤다. 김수현은 어렴풋이 상황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허준영은 과연 김수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통과 의례에서부터 같이 지냈다고 한다. 김수현은 혼란스러워 할까? 슬퍼할까? 아니면 골칫덩어리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기쁠까?

 

허준영은 알만한 감정 표현들을 전부 사용해서 김수현이 무슨 기분일지 추측했다. 하지만 김수현은 김수현이었다. 허준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놈은 아니었다.

 

" 이유정이 나갔다고? "

 

김수현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허준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는 자신을 거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참으로 절묘한 위치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김수현이 말을 이었다.

 

" 그렇군. "

 

김수현은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안솔의 표정이 단숨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날카로운 감각은 용케도 그런 세세한 것까지 포착했다. 과연 그녀는 무엇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일까?

 

허준영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그의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홀 플레인에서 살기 위한 버릇 말이다.

 

" 알겠다. "

 

3번의 반응을 끝으로 김수현을 몸을 움직였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을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이른 아침의 소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안솔은 그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참이나 몸을 떨며 서있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일은 익숙지 않다. 항상 모험의 이정표는 김수현이 알려줬었다. 갓 자립한 새끼마냥 이유정은 막막한 길이 무서웠다. 감정에 치우쳐 클랜에서 나온 이유정은 또한 막막하기도 했다. 지금 다시 돌아가도 될까? 그렇다면 다시 처음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자문자답은 제겐 어울리지 않았다. 

 

이유정은 막무가내로 도시에서 벗어났다. 이 홀 플레인이란 세상에서 혼자 움직이는 만큼 멍청한 짓도 없지만 이유정은 그저 걷고 싶었다. 답답한 마음을 바람을 맞으며 쉬게 하고 싶었다. 

 

" 하아…. "

 

한참동안이나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은 뒤, 이유정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이번에도 그녀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바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씻겨줬다. 김한별에 대한 증오. 김수현을 향한 원망. 그리고 자신의 치졸함에 대한 실망. 여러 가지 감정을 씻겨줬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이유정은 제 가슴을 강하게 한 번 두드렸다. 피를 토할 정도의 고통이 따랐다.

 

아침이 되기 전부터 움직인 발걸음은 달이 까마득히 높이 떴을 때쯤에야 멈춰 섰다. 그동안 한참이나 김수현을 생각하고 있던 이유정은 문득 여행용 물품들이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야영을 하기에도 물건이 부족했다. 오늘은 꼬박 밤을 새야할까. 악(惡)한 사용자를 만날 지도 모르니 무방비하게 잘 수는 없다. 어차피 웬만한 사용자라면 자신이 이길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저 멀리 반짝이는 게 보였다. 불? 아니. 불은 아니다. 밝기가 지속적이지 않다. 뭐랄까, 꼭 햇빛이 반사되는 것처럼 반짝인다. 달빛에 검이 반사됐다는 건 웃긴 소리겠지. 이유정은 그곳을 향해 달렸다.

 

" 크윽! "

 

여성 한 명이 싸우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상대는 몬스터였고, 희미해진 기억에 따르면 그 몬스터는 사람에게, 특히 여성에게 더욱 위협적인 몬스터였다. 이유정은 지체 없이 카타나를 휘둘렀다. 이질감마냥 카타나가 어색했지만 우선은 눈앞에 있는 사용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카타나를 휘두른다.

 

촤악!

" 키엑! "

 

한참 옛적에 잡은 몬스터는 한방에 죽어버렸다. 여성 사용자는 갑자기 죽어버린 몬스터에 놀라 이유정을 보고 검을 겨눴다. 이유정은 양 손을 살짝 들어올려보이는 것으로 같은 사용자임을 표현했다. 그제야 여성 사용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힘이 다한 것인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 가, 감사합니다. "

" …별 거 아니에요. 그보다 이런 녀석들도 쩔쩔 매면서 왜 혼자 다녀요? "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자 상대방은 몸을 움찔거렸다. 이유정은 인상을 쓰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려던 건 아니다. 원체 말투가 안 좋다보니 괜히 타박하는 것 같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 후, 죄송해요. 기분 나빠라는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

" 아, 아니에요.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리고 제가 봐도 저는 한심하기만 해서……. "

 

여성이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이유정은 화를 내고 싶었다. 보아하니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용자 같았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는 건가? 아니. 사용자 아카데미 자체를 나오지 않은 건가? 그런 유저라면 죽기 십상이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

 

장비를 보니 딱 봐도 초보였다. 그것도 초보 중에 왕초보. 이유정은 잠시 고민하다 한 번 생색내기로 했다. 같은 여성으로서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순 없다. 어차피 야영도 하지 못해 밤을 새야하는 날이었다.

 

" 어딜 가려는지는 몰라도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서 야영하는 게 좋을 거예요. 더 움직이다가 또 적들한테 습격 받을 걸요? "

" 그렇지만 저…. "

" 영악한 놈들이라 본능적으로 강한 적은 건드리지 않아요. 이런 곳은 저한텐 놀면서도 이기는 곳이라 상관없고요. "

" 그, 그런가요. "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유정은 기감을 넓혀 감지를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이 여성 혼자 여기 있는 건 수상하다. 혹시 다른 도시에서 오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이런 판단은 항상 김수현이 했다.

 

주위에 아무도 걸리는 대상이 없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여성과 자신의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즉, 여성은 여전히 위험한 상태이다. 동료도 없는 상태에서 여기까지 나온다라. 이유정은 그녀를 따라 바닥에 그저 앉아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방을 바라봤다.

 

" 뭐해요? 여기서 야영해요. "

" 여, 여기서요? 같이요? "

" 아까 그 놈들한테 그냥 몸 대줄래요? 아니면 야영할래요? 지켜줄 테니깐 야영하자고요. "

" 아, 알았어요. "

 

여성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명의 은인, 이라는 걸까. 이유정이 따로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준비했었다는 듯 여성은 물건들을 재빠르게 꺼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사이에는 따뜻한 모닥불과 안전해 보이는 침낭이 자리했다. 온 몸이 피곤하다. 이유정은 침낭에 반쯤 몸을 걸치고, 카타나를 여전히 손에 쥔 채 여성을 바라봤다.

 

" 이름이 뭐에요? "

" 이, 이선아요. 그쪽은요? "

" …이유정이요. "

 

이유정은 의심이 많은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허술해 보이는 여자였지만 이유정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느꼈다. 김수현이 세상을 잘 믿지 말라고 해서? 아니면 그냥 본능 때문에? 이유정은 알 수 없었다. 달이 밝게 떠있었다. 따뜻한 기운에 몸이 노곤해지자 이유정은 전날 밤이 생각났다.

 

단숨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유정은 어깨를 가늘게 떨며 모닥불의 따뜻함에 기대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러자 앞에서 이선아가 말을 걸어왔다.

 

" 저…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봐요? "

 

이선아가 운을 띄었다. 이유정은 답하지 않았다. 이선아는 이유정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머쓱해진 것인지 머리를 긁적였다. 이선아의 표정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 사실 저도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

 

이유정이 움찔거렸다. 이선아는 그저 말을 이었다.

 

" 이곳으로 와서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 사람들이 좋은 분들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알고 봤더니 제가 가진 힘 때문에 저한테 잘해준 거였더라고요. "

" ……. "

" 그 힘이 뭐라고 저를 도와줬을까요? 목숨까지 받쳐가며 절 지켜줘서 전 믿을 사람이 그 사람들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힘을 못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되자…. "

 

이선아의 말은 거기서 잠깐 끊겼다. 이유정은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아도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이선아를 바라봤다. 거짓말이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 이곳은 원래 이런 세상인가요?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만 행동하는 건가요? "

" …여긴 괜찮은 편이에요. "

 

동대륙이나 남대륙으로 가본 적은 없지만, 그 곳도 이곳과 비슷할 것이다. 서대륙만 지나칠 정도로 사용자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인다지만 이곳도 그리 다를 바 없다. 도시에서 벗어나면 남자가 여자를 범하는 장면은 흔치 않게 보이고, 몬스터 또한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범한다.

 

여자가 살아가기에 험난한 세상이다. 그렇기에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이끌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김한별도 김수현에게 이끌린 것이겠지. 이유정은 지금 순수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 이선아가 쓰게 웃었다.

 

" 괜찮은… 편이군요. "

 

서대륙보다 낫다. 하지만 상대적인 건 그 어떠한 경우라도 절대적인 게 되지 않는다. 이선아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정도 강한 척 버티기는 했지만, 이 세상은 그녀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줬었다.

 

보통의 여자들에게는 버티기 힘든 상황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뭐, 안솔을 생각하면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같이 다녔지만 그녀의 정신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짧게 말을 끝낸 뒤 이선아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감정적으로 잠은 오지 않았다. 울적한 기분이 동질감이라도 느낀 모양인지 이유정은 전보다 이선아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궁금증도 생겼다. 무슨 힘이기에 사람들이 도와줬을까? 별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기대한 힘이라기에 이유정도 궁금할 뿐이었다. 하지만 물어보는 건 역시 실례겠지.

 

" 무슨 힘을 가졌기에 그래요? "

 

이선아가 이유정을 한 번 째려봤다. 그러나 곧 표정을 풀었다. 실례인 걸 알면서도 묻는 이유라면 아마 아직까지 신경 쓰이는 등급 때문일 것이다. 이유정은 시크릿 클래스가 아니다.

 

일반 클래스에서 조금 더 높은 레어 클래스이다. 일전에 김수현이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노력만 하면 강해질 수 있다고 했지만 이유정은 강해지지 못했다.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김수현과 함께 있으려고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수련을 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같이 지낸 안현을 마음이 약해 때리지 못한 것인가? 웃긴 소리. 실컷 때려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역시 클래스의 차이인가. 아니면 애정의 차이인가. 이유정은 결과적으로 안현보다 약했다. 언제 이렇게 큰 격차가 난 건지 이유정은 알 수 없었다. 여자와 남자의 신체 차이인가.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이미 10강에 여자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 이유정은 스스로가 절박하다고 생각됐다.

 

" 악마의 힘이요. "

" …네? "

" 천사들과 대립하고 있는 악마의 힘을 지녔다고요. "

 

이유정은 잘못 들었는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재차 이선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상황 판단을 시작했다. 악마의 힘? 그렇다는 건 일전에 본 것처럼 그녀는 악마의 편이라는 건가?

 

그녀를 지금 이 곳에서 죽여야 하나? 하지만 그녀는 약한 몬스터도 못 이길 정도로 약하다. 그렇다고 사람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생각은 길었고, 행동은 간단했다. 그녀는 이선아의 목에 카타나를 가져다댔다.

 

이선아가 놀란 듯 쳐다봤다.

 

" 지금 무슨 짓을…! "

" 악감정은 없어요. 하지만 악마를 가진 사람의 말로를 이미 봐버린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네요. "

 

카타나를 횡으로 약하게 긋는다. 입맛이 씁쓸했지만, 고통 없이 죽였으니 이보다 더한 처사도 없을 거라 이유정은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거짓말처럼 피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고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 아……? "

' 어떻게? "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재차 카타나를 휘두르지만 상대방이 한 손으로 카타나를 잡아냈다. 이런 약한 사용자에게도 막힐 정도로 제 힘이 형편없었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가만히 서있던 이선아는 이젠 화를 내고 있었다.

 

" 고작 그 이유 때문에 나를……! "

" 악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곳에선 죽어야 하는 거예요. "

 

천사의 적이니깐. 우리들의 적이니깐. 김수현이 악마를 싫어하니깐. 악마는 죽어야 마땅한 거고, 그 힘을 가진 사람도 죽어야 마땅한 거겠지? 이유정은 스스로 옳다 판단했다. 다른 손으로 카타나를 휘두른다. 목과 심장이 아닌 급소를 노린 카타나는 초보가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

 

" 그저 살고ㅅ…. '

 

즉사(卽死). 말을 끝맺지 못하고 앞으로 천천히 기울어지는 이선아의 표정을 이유정은 외면할 수 없었다. 이선아는 죽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는 모르겠지만 악마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손에 죽었다.

 

김수현이 칭찬을 해줄려나. 아니면 천사가 보상을 해줄려나. 

 

- 후….

 

씁쓸한 마음으로 침낭과 이선아를 번갈아 본다. 그 때, 이유정은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죽었다고 생각한 이선아의 몸이 점점 검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이 광경을 한 번 본적이 있었다.

 

놀란 그녀는 전에 없던 속도로 카타나를 휘둘렀다. 하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한 카타나는 이선아를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도망쳐야 하나? 나 혼자서 악마를 잡을 수 있을까? 무리다. 김수현이 없다면 자신은 그저 죽을 뿐이다. 이유정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달리려고 했다. 그 순간,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들었던 더러운 악마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 불완전한 힘으로 있는 건 역시 버겁군.

 

밑에서부터 소름끼치게 올라오는 차분한 목소리는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가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러자 옷을 말끔히 갖춘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가 서있었다. 그에게선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소름이 끼칠 뿐이었다.

 

- 싸울 의사는 없다. 그리고 지금 나에겐 싸울 힘도 없다. 그러니 무기는 거둬줬으면 좋겠군.

" 개소리! "

 

부랑자하고도 말을 섞지 않는 자신이 악마하고 말을 섞겠는가? 희대의 개소리다. 이유정은 다시 한 번 카타나를 휘두르려고 했다.

 

- 김수현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 무슨…?! "

 

악마에게서 그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자 몸이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김수현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는 강하니깐. 그렇지만 악마는 정말 말 그대로 싸울 의사가 없어보였고, 아직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서있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 자리에 앉기 시작한 악마는 더 서있지도 않았다. 악마는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다는 마냥 침낭을 만지고 있었다.

 

그래도 악마는 악마다. 분명 모종의 이유 때문에 이곳에 나타난 것일 게다. 카타나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 듣고 아니다 싶으면 그 때 죽여도 상관없지 않나?

 

악마의 말은 옳았다. 악마답지 않다, 라고 할 정도로 정직했다. 이유정은 한참이나 카타나를 들고 있다, 거리를 벌린 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악마를 노려봤다.

 

클랜을 나오고 악마와 이야기한다. 누가 봐도 자신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유정은, 한동안 악마와 대화를 나눴다. 김수현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말이다.

level.3 사용자 태사냥

늘처음처럼

성별
직업
용병
성향
레벨
Lv.3
경험치
2000 EX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