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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 2
level.3 태사냥
  • 2016-03-27 16: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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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김수현은 모든 일을 끝마친 뒤 원정을 나가려고 서있었다. 이유정이 클랜을 떠났으나 어차피 그녀는 이번 원정에 참가할 여력이 안 됐다. 지금 가는 곳은 이유정의 능력으로는 같이 갈 수준이 되지 못한다.

 

이유정이 클랜을 나간 건 의외였으나 김수현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순간의 감정이겠지. 돌아올 것이다. 이유정은 그런 녀석이니깐. 그리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크게 상관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머셔너리 클랜은 강하다. 이유정이 빠진다고 해도, 크게 전력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수현이 신경 써야 할 건 제 2차 탈주자다. 더 탈주할 인원이 있나 유심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안솔 때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 괜찮은 거지? "

 

안솔은 벌벌 떨고 있었다. 이유정이 나간 뒤로부터 그녀는 항상 우울해있었다. 의외로 이유정이 안솔에게 해준 게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무렵, 안솔은 이번 원정을 가기 싫다고 이야기했다.

 

안솔 정도의 사용자가 빠지는 건 큰 문제다. 어떤 공략에서도 훌륭한 능력을 보여줬던 그녀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김수현 본인이 세긴 하다지만 의외의 상황에서 능력을 발휘할 재주는 없었다.

 

기적의 권능. 그것으로 전세를 뒤집어엎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솔이 꼭 필요했다. 김수현은 안솔을 다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설득했다. 안솔은 끝끝내 좋아하는 사람의 설득을 버티지 못하고, 같이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 네, 네…. "

 

안솔의 행운 능력치가 왜 이번 원정을 가기 싫어하는지 몰랐다. 설마 또 동료가 죽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위험한 건가? 하지만 머셔너리 클랜은 전과 다르다. 게다가 김수현은 안솔이 떤다고 해서 무턱대고 가지 않을 사람도 아니었다.

 

안솔이 보여준 것들은 진귀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막연히 안솔에게만 기대서 행동하는 건 어리석다. 어떤 상황이 와도 최선의 선택으로 모두를 살리고, 공략에 성공한다. 김수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내가 죽는 것도 아니고, 네가 죽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

 

김수현은 안솔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혹시 자신이나 안솔이 죽을 위기에 처하느냐. 안솔은 모른다고 답했다. 다만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부상을 입는 건가?

 

안솔의 능력은 미래 예지가 아니기에 알 수 없다. 싱거운 이야기다. 김수현은 딱 거기까지만 해석했다.

 

" 유정이 언니…. "

 

안솔은 뭐가 불안한 건지 몸을 떨 때마다 이유정의 이름을 재차 언급했다. 그런 안솔을 바라보는 모두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보다 못한 고연주는 아예 안솔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를 제외한 14명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걱정을 품은 채 김수현의 지시를 기다렸다.

 

" 출발하겠습니다. "

" 사, 사용자 분들의 생환을 기원합니다! "

 

김수현이 말하자 모두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거주민 경비병은 머셔너리 클랜의 마지막 한 명 까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다, 문을 닫았다.

 

 

 

 

 

 

- 너는 김수현을 어떻게 생각하지?

" ……. "

 

악마의 질문은 꽤나 생뚱맞은 것이었다. 이유정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해야 하나 아니면 화를 내야하나 둘 중 고민을 하다 결국 답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악마는 그녀의 침묵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했다.

 

- 김수현은 위험한 자다. 물론 우리 악마들에게 말이지. 너희들에게는… 그래. 구원자라고 봐도 좋겠군.

" 오빠가 대단하긴 하지. "

- 우리는 천사를 이길 수 있다 생각했지만, 김수현이라는 인간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다.

" 잘 됐네. 얼른 꺼져. 그래야 우리가 편해지지. "

 

이유정의 말은 냉정했다. 악마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필요는 없다. 더군나다 기분도 나쁘다. 원래 말투가 거침없이 나올만한 그녀로서는 오히려 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한 자비를 베푸는 거라고 볼 수 있다.

 

- 가기 전에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다.

" …가만히 들어주니깐 내가 만만해 보여? 악마나 나한테 부탁을 해? 농담도 작작 해야 들어주지! "

- 충분히 보상은 해주지. 너에게 해가 될 건 없을 거다.

 

악마의 말을 믿는 멍청한 녀석이 어디 있겠는가. 이유정은 코웃음을 쳤다.

 

" 그래. 보상도 충분히 해주시겠지요. 그리고 나는 악마의 편을 든 괴물이 되고 말이야. "

- 내가 너에게 무슨 부탁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 보나마나 오빠한테 해가 되는 거겠지. 안 그래? 너희들은 오빠가 가장 무서우니깐 말이야. "

- 하하. 농담은 아니겠지?

 

이유정은 인상을 썼다. 악마는 정말로 재밌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거슬렸다.

 

- 바꿔 물어보지. 내가 지금 너에게 김수현을 죽여 달라 부탁해도 너는 할 수 있나?

" 내가 어떻게 오빠를…! "

- 아니. 네 능력으로 김수현을 죽일 수 있냔 말이다.

 

그럴 리가. 이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김수현을 죽일 수 있냐고? 절대 무리다. 안현에게도 진 자신이 어떻게 김수현을 이기겠는가.

 

- 그렇다면 너는 김수현 곁에 있는 동료들을 이길 능력이 있나?

……. "

 

으득, 하고 이빨이 부딪쳤다. 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안현도 못 이긴다. 그보다 더 강한 사람들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악마가 말하는 것의 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 그런 너에게 내가 뭘 부탁해야 김수현에게 해가 된다는 거지?

" …그래. 그렇다고 쳐. 근데 그렇다고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줄 용의는 없잖아?

-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면 지금 네가 제일 원하는 걸 주지. 

 

원하는 거라면 김수현이다. 김수현을 갖고 싶다. 이유정은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지 못했다. 악마에게 속내를 들킬까봐 쪽팔려서이다. 대신 그녀는 무덤덤하게 악마를 쳐다볼 뿐이었다. 악마는 그런 이유정에게, 보상을 이야기했다.

 

- 힘을 주겠다. 누구도 너를 깔볼 수 없는 힘을. 네가 이야기하는 그 녀석도 마음에 들어 할 힘을 말이다.

 

악마는 제 상황을 모두 관찰하고 온 것일까? 악마의 유혹은 달콤했다. 지금 이유정은 힘을 원하고 있다. 안현과 김한별을 이길 정도의 힘. 그 정도로 막강한 힘을 원하고 있다.

 

이성은 악마의 말을 듣지 말라 하고 있다. 감정은 악마의 말이라도 타당하면 들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선, 악마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정은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기로 했다.

 

- 들을 마음이 생긴 모양이군. 부탁하려는 건 간단하다. 서대륙의 사용자들을 죽여줬으면 한다.

" 서대륙의 사용자들을? 왜 그런 일을 원하는 거지? "

- 먼저 설명을 해줘야겠군. 서대륙이 다른 대륙과 달리 무법천지가 된 건 악마들의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대륙에서 계획을 성공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수현이 우리의 계획을 저지하고 말았지.

" 역시 너희 악마들의 짓이었군. "

 

무법천지의 서대륙. 같은 인간으로서 보기 힘든 행위는 역시나 악마의 계획이었다.

 

-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물러나겠다고 했지. 그러기 위해서는 서대륙에 남겨진 우리의 잔존물들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것이다.

" 그걸 굳이 없애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냥 놔두면 안 되는 건가? "

- 후에 서대륙의 사용자들이 북대륙으로 넘어와 침략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지.

" …하나 이해 안 가는 게 있어. "

 

굳이 악마가 왜 서대륙에 남아 있는 악마들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는 걸까? 정말로 물러나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악마들이?

 

" 너희들에게는 서대륙이 북대륙을 침략하는 게 이득일 텐데? 물러난다는 이유로는 납득이 되지 않아. 굳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부탁하는 이유가 뭐지?

- 우리를 못 믿는 거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라면, 우리도 우리의 전력을 낭비하기 싫어서, 라고 답할 수 있겠군.

" 그건 무슨 말이지? "

- 서대륙에는 아직 악마의 씨앗이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서대륙의 마이너스 기운으로 그 악마가 소환될 수 있다. 뭐, 악마가 깨어나더라도 김수현의 힘이라면 죽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더 다른 악마가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

" 다른 악마가 죽지 않았으면 해서 서대륙의 사용자들을 죽여 달라고? "

- 어차피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 안 하지 않나?

 

이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륙의 인간들은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본능대로만 움직이고 힘으로 움직이는 곳인 서대륙은, 이유정이 보기에 결코 같은 세상이 아니었다. 흡사 지옥. 아니, 지옥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한다.

 

-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남은 건 네 결정을 기다리겠다.

 

악마의 이야기가 끝났다. 악마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이유정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봤다. 서대륙의 사용자들을 죽인다. 문제될 건 없다. 서대륙으로 넘어가는 방법과 힘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어차피 클랜에서 나왔으니 자신을 말릴 사람도 없다. 서대륙의 부랑자들을 상대로 경험을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악마가 제안한 것이라 껄끄럽다. 이유정은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섰다.

 

" 나는 악마들의 힘을 빌려서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 "

- 누가 너에게 힘을 빌려준다는 거지?

" 아까 너희가 힘을 주겠다고…! "

- 힘을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사용자인 너희들에게 딱 맞는 게 있지. 여자의 짐을 살펴봐라.

 

이유정은 잠시 머뭇거리다 악마의 말을 따랐다. 악마의 힘으로 강해지기는 싫다. 생활용품 몇 개를 뒤적거리다 이유정은 안에서 검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검은 꽤나 작은 크기였고, 그 어떤 치장도 되어있지 않은 간소한 검이었다.

 

이유정이 악마의 눈치를 살피며 검을 확인했다.

 

『마검 : 듀란달(Durandal)』

 

1. 일반 설명.

Ⅰ. 본래 성검이었던 듀란달은 ──.

 

이유정은 다 읽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마검, 듀란달. 악마가 준 물건이니 성검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마검이라는 글자를 보니 가슴이 턱하니 막혀오는 게 막연히 불안해진다.

 

이유정은 악마를 바라봤다. 악마는 미소 짓고 있었다. 막연한 불안감이 배가 되기 전, 악마가 쐐기를 박았다.

 

- 그 김수현이라는 녀석이 가진 무기와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마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복제품도 아니다. 성검이 그저 타락해서 마검이 되었을 뿐이다. 그 내력은 궁금하지 않다. 이유정은 고민했다. 저 검을 잡으면 강해질 수 있다. 안현도, 다른 이들도 모두 좋은 장비가 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 보상 심리에 기대어서 이 검을 잡아도 좋지 않을까? 당장에라도 마검이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의존하지 말고, 휘둘리지 말라고. '

 

문득 김수현의 말이 생각났다. 이유정은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바로 가방을 닫았다. 김수현이 이야기했었다. 지금 이곳에 없는 김수현이지만, 김수현은 자신에게 무기에 의존하지 말라 이야기했다.

 

마검 스쿠렙프에게 잠식당하지 말라며. 마검은 악하다. 그 마검으로 강해지는 건 옳지 못한 생각이다. 이유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는… 이런 거를 쓰지 않고도 강해질 수 있어. "

- 네가 그를 신경 쓰는 만큼 김수현이 너를 신경 쓰는지 모르겠군.

 

악마는 그 후로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유정은 고개를 들어 밝은 달을 쳐다봤다. 클랜에서 김수현은 뭘 하고 있을까? 그가 생각났다. 안솔도 생각났다. 사람 한 명 죽는 정도로 질질 짜는 녀석이니 지금 뭘 하고 있을 지 대략적으로나마 눈에 그려졌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선잠에 든 채로 이유정은 악마를 의식했다. 하지만 악마는 사라진 것인지, 마찬가지로 자는 것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이유정은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원정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붉은 장막 안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머셔너리 클랜이라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김수현을 응시했다.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김수현은 장막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솔이 걱정하고 있었던 게 이거였나? 계속해서 떨고 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안솔의 감을 무시한 김수현의 잘못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상황은 급할 대로 급해져 김수현조차도 더 손 쓸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한 차원이 붕괴되고 있다. 기적 따위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 모두…. "

 

김수현은 말을 꺼냈다. 기대를 하며 바라보는 모두를 흘끗 쳐다본 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최강의 방어막을 준비합니다. "

" ……. "

" 제 마력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는 중입니다. 그러면 이 장막도 끝이에요. 그 전에 승부를 보겠습니다. "

" ……. "

 

모두가 김수현의 말을 이해했다. 방어막을 풀고 근원을 해치우겠다는 뜻이다. 가장 전투력이 강한 김수현에게 모든 것을 건다. 나머지 인원들은 김수현이 근원을 해치우기 전까지 시간을 번다.

 

허준영이 앞으로 나섰다. 그 외에 다른 몇 명의 인물들도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김수현의 뒤에서 마력을 방출하고 있었다.

 

" 신호를 하고 가겠습니다. "

 

상대적으로 몸이 약한 여자들과 원거리 클래스들을 뒤로 보내는 행위이다. 차원이 무너지는 마당에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순 없었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김수현은 장막 너머를 차분히 바라보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한 광경에, 입을 열었다.

 

" 바로 지금! "

 

장막이 사라지고, 거센 기운이 모두에게 들이닥친다. 김수현은 더 이상 뒤를 생각하지 않고 위를 향해 뛰어갔다. 근원으로부터 빛무리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아슬아슬하게 돌조각들을 밟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잽싼 김수현의 몸놀림으로도 올라가는 건 한계가 있었다. 가려는 곳은 명확하다. 그리고 상대방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날지 않는 이상 떨어지는 돌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빛무리는 김수현을 조준한 다기보단 돌을 조준했다.

 

" 아아아! "

 

그리고 김수현이 그 돌을 밟으려 할 때, 공격을 날렸다. 그 아찔한 상황에 안솔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김수현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기도가 먹힌 것일까? 더 마력을 짜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인원이 생겨났다. 김수현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

 

빛무리가 김수현을 강타하려는 순간 김수현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허준영은 놀란 눈으로 김수현을 바라봤다. 마력이 많이 드는 행위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저러면 공격을 하는 데 충분한 마력을 담지 못한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허준영은 남은 인원들을 모두 살펴봤다. 고연주가 땀을 흘리며 뻘뻘대는 모습이 보였다.

 

"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

" 이제 한계에요…! "

" 그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할 만하군. "

 

허준영은 힘을 뺐다. 남아 있는 마력을 모두 짜내 그의 무기에 담았다. 그리고 김수현에게 그것을 던졌다. 근원을 파괴하는 데에는 힘을 주지 못하겠지만 발판 정도라면 충분히 될 수 있다.

 

그간 허준영을 지지해줬던 마력이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자 허준영은 몸을 비틀거리고 말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게 어지러워 버틸 수가 없었다.

 

" 지금 무슨 짓을… ! "

" 어차피 죽을 거라면… 혼자서 죽는 게 낫겠지. "

 

마력 고갈. 혼자 도망간 것도 아니고, 김수현을 위해 마력을 보냈다. 고연주는 당황하며 주위를 쳐다봤다. 허준영이 빠진 만큼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한 줌의 원망도 없었다.

 

김수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마력이 많은 제갈 해솔은 쓰게 웃으며 김수현을 쳐다봤다. 김수현은 또 아슬아슬하게 빛무리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이라면 근원에 상당히 가까워졌단 것이다. 앞으로 두 번 정도만 더 뛰면 도착한다.

 

김수현이 재차 돌을 밟고 가까워지자 빛무리는 더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근원이 바로 코앞에 왔을 때, 거대한 빛무리가 김수현을 집어삼키려듯이 김수현이 밟고 있는 발판을 향해 날아갔다.

 

" 무기를 밟아요! "

 

쓰러진 허준영을 대신해서 고연주가 크게 소리쳤다. 김수현이 고개를 돌려 허준영이 보낸 무기를 확인했다. 마력을 품은 무기는 상당히 높이 올라갔으나, 부딪쳐오는 돌들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마력이 사라지기 전, 돌에 부딪친 무기를 김수현이 밟고 뛰어올랐다. 근원을 뛰어 넘어 도약한 김수현은 아래의 상황을 그제야 볼 수 있게 됐다. 아래는 처참했다.

 

" 빌어먹을! "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력에 담는다. 그리고 근원을 향해 공격한다.

 

화아아아아아악!

 

근원이. 그 옆에 있던 모래시계를 포함해 모두 부서졌다. 모래시계는 김수현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잘게 부서졌고, 그 조각들은 군데군데 흩어져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이 빛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격에 모든 힘을 쏟은 김수현은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빛이 폭발하며 한 명의 영웅이 힘없이 아래로 추락하자, 아래에서 그나마 멀쩡하던 안솔이 바삐 몸을 움직였다.

 

" 오라버니이이이이! "

 

조금이라도 남은 마력을 끌어내보려고 했지만 김수현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근원의 내구도가 어떤지 몰랐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그의 힘을 모두 썼어야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근원을 깨면, 아래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모두가 안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김수현은,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 ……. "

 

귓가에 아른거리듯 주변에선 물기 가득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잔잔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정상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럼 아직은 살아 있는 건가? 아니, 살아난 건가?

 

체력이나 마력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으나 그 외 별 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김수현은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오, 오라버니……. "

 

안솔은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띠링!

『전설의 업적!』

 

메시지가 눈앞에 출력됐다. 그렇지만 김수현에게 그 메시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수현의 눈에는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동료들이 눈에서 떠나지 못했다.

 

" 모두가…. "

 

안솔은 끝내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원정이 끝났다. 보상이 서서히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원정에서, 김수현은 적지 않은 동료를 잃었다.

 

 

 

 

 

 

잠에 든 건지 아니면 눈만 감고 있었던 건지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함이 온 몸을 엄습했을 때, 불현듯 따스함이 느껴지자 이유정은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이유정은 눈을 뜨자마자 악마부터 찾았다. 하지만 악마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사라진 건가? 밤새 고민하던 원인이 사라지자 이제는 당황함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이유정은 주위를 둘러보다 악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깨닫고, 가방을 살폈다.

 

가방 안에는 아직 마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검을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다. 보란 듯이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져서 다시 클랜으로 돌아오겠다. 그리고 자신을 깔본 김한별을, 안현을 이기겠다.

 

그 때 쯤 되면 김수현도 자신을 다시 바라봐주지 않을까? 이유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검이 든 가방을 다른 쪽으로 치워버렸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면 이것으로 싸울 지도 모른다. 마검을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니 아예 숨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마검을 확인한 결과, 홀리거나 미친다는 설정은 없었으나 그래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마검을 나름 봉인(?)한 다음, 이유정은 먼저 주위를 살폈다. 아침이 되었다지만 경계를 늦출 순 없다. 지금 그녀 주위에는 그녀를 지켜주는 동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이른 경계였을까, 멀리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위협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품 한 쪽 깊숙이 넣어둔 카타나를 꽉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본 적 없는 얼굴들이었다.

 

이유정은 몸을 어느 정도 은닉하고 그들을 살폈다. 4인으로 구성된 캐러밴은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임이 틀림없으나 저들은 초보임에 틀림없었다. 이유정은 어느 정도 몸을 드러내고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표정은 희한했다. 일단은 이곳에 여자 혼자 있다는 게 의아했던 건지 경계를 표했다. 아마 미인계를 쓰는 부랑자라도 어디서 만났던 모양이다. 이유정은 손을 살짝, 아주 살짝 들어 올려 무저항을 표했다.

 

" 사용자 맞으시죠? "

 

부랑자 맞지?! 이 질문보다 더 어이없는 질문에 이유정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리려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상대방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온순해졌다.

 

"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혼자 뭘 하고 계신 건가요? 여긴 위험한데…. "

" …무슨 일이 있어서요. "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은 곳이다. 이유정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더 가면 위험할 수준이 되겠지만 지금은 혼자서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머셔너리 클랜에서 나온 몸이, 나는 꽤나 강하니깐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기에는 너무 야박한 것 같아 이유정은 일상의 여자를 연기하기로 했다. 원래 제 말투가 나오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보아하니 아무 것도 모르고 도시에서 뛰쳐나온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

" 제 한 몸 지킬 힘은 있답니다. "

" 그렇지만 조금 더 가면 정말 위험해지니 조심하도록 하세요. 특히 최근에는 괴물들이 더욱 날뛰고 있어서 말이죠. "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초췌해보였지만, 이유정은 궁금한 게 생겨 기어코 한 번이라도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지나치려는 남자를 붙잡고 한 마디 더 해본다.

 

" 괴물들이 날뛰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

" 그게… 뭐랄까……. "

 

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는 듯 한 고민을 보여주었고, 이유정은 단호하게 그런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꺼냈다.

 

" 저, 머셔너리 클랜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

" 네, 네! "

 

이유정은 얼떨결에 자신이 머셔너리 클랜이다, 같은 말을 하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예상했다는 듯이 상대방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시작했다.

 

머셔너리 클랜.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이유정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왔던 클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머셔너리 클랜은 괴물이 날뛸만한 일은 전혀 벌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지? 아니면 혹시 비비앙이 소환한 것들을 괴물이라 착각해 초보들이 공격이라도 한 건가?

 

그 정도는 신빈성 있다. 확실히 동료이기는 해도 소환하는 군단(?)이라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니깐.

 

" 머셔너리 클랜을 아신다면 이야기가 쉬워지겠군요. 아시다시피 최근 사용자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고, 동경하고 있는 클랜이 머셔너리 클랜 아닙니까. "

" 뭐… 그렇긴 하죠. "

 

다른 사람에게서 제 클랜을 아니, 자신이 나온 클랜을 칭찬하는 걸 듣는다는 게 이렇게 기분이 이상할 줄은 이유정은 꿈에도 몰랐다. 이유정은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대답했지만, 묘한 기분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 그 머셔너리 클랜의 마스터, 김수현 사용자의 성공 신화를 따라잡고자 최근에 많은 초보 사용자들이 무턱대고 여러 지역을 가보기도 합니다. "

" 허.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

"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홀 플레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많이 없는 놈들이 이리저리 사고를 치고 다니니 문제가 생기고 말았지요. 동경하는 마음은 같은 남자로서 저도 잘 알고 있지만, 덕분에 괴물들이 날뛰는 꼴만 만들어줬습니다. "

" …괴물들이 초보 사용자들을 잡고 더 강해진다는 말인가요? "

" 차라리 그거라면 더 낫겠지요. 아예 여성 사용자들은 잡은 다음에 모체로 만들어서 더욱 무리를 확장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괴물 퇴치 의뢰가 아주 산처럼 쌓였습니다, 쌓였어요! "

 

그제야 상대방의 복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악취를 풍길 것 같은 초록색 체액이 묻어져 있었다. 괴물의 피인가. 이유정은 왠지 냄새라도 날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리다, 풀었다. 머셔너리 클랜 때문에 초보 사용자들에게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머셔너리 클랜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웃긴 상황이다. 대체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뭘 배웠다는 말인가?

 

" 더군나다 최근에는 쟁쟁한 사용자들이 대거 유입되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사용자들을 설득하고 다니기 때문에 더욱 문제됩니다. 후우… 언제 이 사태가 끝이 날지. "

" ……힘내세요. "

 

이유정은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잘해보라는 듯이 어깨를 툭툭 쳐줄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그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모양인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 앞은 온통 괴물 천지라는 말인가. 머리가 피를 맛본다는 생각이라도 한 건지 카타나가 떨고 있는 게 느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유정은 그 환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가 그것을 눈치 챈 모양인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유정을 흘끗 쳐다봤다.

 

이유정은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 그럼 지금 머셔너리 클랜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

 

개인적으로 이유정은 김수현이 그녀를 찾길 원했다. 사춘기 소녀마냥 토라진 다음 가출한 뒤, 부모가 찾길 바라는 입장은 아니었지마 그래도 김수현이 그녀를 찾길 원했다. 하다못해 안솔이라도. 유정이 언니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면서 안현을 데리고서라도 그녀를 찾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헛된 희망일까. 들리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 머셔너리 클랜이라면… 대규모 원정에 나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등급제로 바뀐 것은 알고 있겠죠? S급 두 명과 그 밑에 쟁쟁한 실력자들을 데리고 원정에 나갔더군요. 마스터 김수현 사용자는 당분간 클랜은 신경도 못 쓸 겁니다. "

" ……. "

" 왜 그러시나요. 혹시 클랜에 들어가고라도 싶으신 건가요? "

" …아니에요. "

 

그럴 줄 알았다. 사실, 김수현은 냉정하다. 그 누구보다 냉정하고, 이유정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 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녀가 생각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 널 찾고 있을 시간은 없어. '

 

김수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핑계라면, 바빠서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여자가 차고 넘치는 곳에서 굳이 그녀에게 매달릴 이유는 없단 의미도 되겠지. 이유정은 문득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사내에게서 물러났다. 사내는 의아하다는 듯 이유정을 쳐다봤다.

 

"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

" 자, 잠시……! "

 

사내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이유정은 잽싸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달리고 달려, 사내에게서 멀어졌다. 사내의 동료들이 뭐라 말하는 게 들렸지만 이유정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 씨발! "

 

고연주는 매력적이다. 다른 여자들도 매력적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김수현이 때때로 다른 여자들하고 밤에 관계를 가진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이유정은 알고 있었지만, 애써 그것을 포장했다.

 

자신은 소중하니깐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거라고. 왜, 웃긴 말로도 여자들은 하면 할수록 걸레 취급을 받지만 남자들은 하면 할수록 명기 취급을 받는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에게나 뚫리는 자물쇠와 모든 걸 뚫는 마스터키.

 

이유정은 김수현이 자신을 아낀다고 생각했다. 안솔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둘 중 누구 하나를 고르자면,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인 안솔보다 매력적인 자신, 이유정을 고르리라 생각했다.

 

" 나쁜 놈… 흐윽……. "

 

하지만 그건 이유정의 착각이었다. 원래부터 김수현은 이랬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욕설을 뱉고 있지만 이유정은 여전히 제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자신은 김수현을 좋아한다. 그리고 김수현은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그리고 김수현은, 그녀를 뺀 나머지 인물들에게 사랑을 나눠준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현실이었다.

 

 

 

 

 

 

다시 한 번 하루를 눈물로 지새우고, 다른 날은 살육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걸 반복했지만 이유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퇴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유정은 김수현이 가르쳐준 것을 모두 잊어버렸고, 이제는 그저 본능이 따르는 대로 카타나를 휘두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에는 분명 모든 게 괜찮았다. 중간 정도에도 괜찮았던 것 같다. 그녀는 김수현이 바라는 유능한 사용자였고, 또한 유능한 여자였기에. 그렇지만 고연주, 그녀가 나타난 뒤로부터 무언가 크게 바뀌어가기 시작하더니 종지에야 이유정은 클랜에 있으나, 마나 한 인물이 되었다.

 

고연주와 이유정의 차이. 그건 몸매 같은 게 아니어도 알 수 있다. 약하다. 이유정은 지독히도 약했다.

 

이유정은 숨겨놨던 가방 앞에 섰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울적했던 기분이 모두 날아간 것처럼 기분이 고양되어갔다. 왠지 모르게 가방 앞에 서자 몸이 들떴다. 악마가 저주라도 걸어둔 걸까? 아니면 정신이 나갈 걸까?

 

지금까지 홀 플레인에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소리를 들었다. 미친년이라는 말도 들었고, 걸레라는 말도 들어봤다. 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이유정은 강하게 나갔다. 안솔처럼 마냥 기대기만 해선 안 된다. 그런 여자는 남자에게 민폐다.

 

강해져야 한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이유정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실은 안솔처럼 울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가 되고자 했던 꿈이, 나약해지는 그녀를 막았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이유정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죄악심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혹자에게 강해지기 위해 악마의 편을 들 거냐고 물어보면 100에 80정도는 싫다 대답할 것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숫자에서, 이유정은 20을 택했다.

 

마검을 집고, 가지고 있던 카타나를 내려놓는다. 마검은 그 긴 세월동안 같이 지낸 카타나보다도 더욱 손에 익었다.

 

- 결국 잡게 되었군.

" 기분 좆같으니깐 닥쳐. "

- 그럼 우리의 제안을 수락한 것으로 알겠다….

" 닥치라고!! "

 

누가 본다면 검에다가 소리를 지르는 미친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유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악마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게 기분 나빴지만 검을 한 번 휘두르고 나니 그것마저도 날려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자신은 미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였다.

 

- 서대륙에 남아 있는 인간들을 죽여라.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악마는 그 말을 남기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서대륙으로 가는 지, 전부 죽여야 하는지, 자세한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마검을 잡자 이유정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이 확 뜨인 기분이었다.

 

이유정은 한 번 제 능력치를 살피려다 곧 그만두었다. 그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 일이다. 우선 지금은,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싶다. 이유정은 비릿하게 웃으며 마검을 계속해서 휘둘렀다.

 

그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은, 그 근처의 지형에겐 결코 좋지 않았다.

 

 

 

 

 

 

처참한 원정이 끝나고서, 모두들 클랜으로 돌아왔다. 김수현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몰린 상태였다. 그는 평소처럼 클랜원들이 뭐라 이야기해도 형식적으로나마 웃어주지도 않았고,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클랜원들은 그런 김수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실로 모순적이게도 원정대에서 살아남은 모두가, 김수현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누구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다. 김수현은 평소처럼 의젓해보였지만 며칠 동안 지낸 모두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수현은 위태로웠다. 그것도 심할 정도로 말이다.

 

" …나는 보고를 하고 클랜으로 돌아간다. "

 

으레 원정이 끝나면 그렇듯, 김수현은 보고를 하러 갔다. 다른 클랜원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리면 좋을지 고민하다,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결국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클랜으로 돌아갔고, 또 클랜에 남아 있던 클랜원들이 마중 나왔을 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클랜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동료가 죽은 클랜. 그곳의 분위기는 이러했다.

 

한편, 김수현은 보고를 끝마치고 클랜에 돌아가려고 할 때, 누군가에게 붙잡힌 상황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시간을 끄는 상대방을 떨쳐내려고 마음먹었을 때, 상대방이 갑자기 신전으로 오라 이야기했다. 천사의 부름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는 걸까? 세라프를 보기에 기분이 심히 나빴지만 김수현은 그냥 가기로 마음먹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했다. 어차피 나중에도 봐야할 거, 지금 모든 걸 처리하고 쉬는 게 훨씬 나았다. 김수현은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사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세라프가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욱 안 좋아져 있었다. 김수현을 보고 애써 원래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생각하려는데, 세라프가 먼저 선수를 쳤다.

 

" 동대륙에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

" …별 웃긴 소리도 다 들어보는군. 이런 헛소리를 할 거라면 난 이만 가보겠어. "

" 정말입니다! 지금 동대륙과 연락도 안 된다고요! "

 

김수현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악마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나타날 리가 없다. 악마에게 휘둘릴 정도라면 동대륙의 전력이 약하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렇다는 건, 악마가 동대륙을 접수해봤자 전력은 약하다는 말이다.

 

악마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지옥도 아니고, 온전한 힘도 펼칠 수 없는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다. 아니면 정말 미친 건가? 그 동안 자신이 계획을 다 부숴버려서?

 

"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압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요. 그렇지만…! "

" …알았으니깐 그 입 닥쳐. "

" 사용자 김수현……. "

 

세라프가 애처롭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김수현의 마음은 그대로였다. 천사에게 또 다시 동료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듣고 싶지 않았다. 김수현은 잠시 생각을 했다. 악마가 나타난 건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동대륙의 전력이 약해도 악마가 나타난 이상 꾸준히 강해질 것이다. 내버려두면 큰일 난다.

 

하지만 당장 이 일을 해결하기에 클랜 사정이 좋지 않다. 혹시 다른 클랜에 부탁하면 안 되는 걸까? 김수현은 이 생각을 끝마치지 않고도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건 비단 김수현에게만 내려진 부탁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 …생각하시는 대로 다른 클랜에게도 말해뒀습니다. 모두 김수현이 귀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발하기를요. "

" 미치겠군. "

 

솔직한 심정을 내뱉으며 김수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이 가야한다. 악마가 나타난 이상 자신 없이는 이길 수 없다. 지금 인원으로는 큰 피해를 초래한다. 제 형이 다치는 것을 보기도 싫었고, 다른 인연들이 다치는 것도 보기 싫었기에 김수현으로서는 막무가내로 천사의 부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라면 적어도 모든 클랜원을 데리고 가야한다. 그만큼 이건 개인 문제가 아닌, 대륙의 문제인 것이다. 김수현은 한숨을 쉰 다음, 결국 최후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 원정에 갔다 온 사용자들은 쉬게 하겠다. 그들에게 까지 출정하라고 말한다면 나는……. "

" 알겠습니다. 다만 사용자 김수현만이라도 부디 동대륙으로 출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빌어먹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체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까? 갑자기 악마라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움직이지 않기에는.

 

" 그래. "

 

더 상황이 좋지 않게 될 게 뻔하다.

level.3 사용자 태사냥

늘처음처럼

성별
직업
용병
성향
레벨
Lv.3
경험치
2000 EXP